▲ 독립운동가 후손 심정섭 씨가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에 관한 사료들을 모아 발간한 자료집들이 꽂혀 있는 책장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애국지사 후손이자 향토사학자 심정섭 씨

애국지사 백강 선생 후손으로 외조부 수집 의지 이어
근현대사 자료 3300여 점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
이완용 등 친일 행각 담은 ‘조선 공로자 명감’ 공개

[천지일보=이지수 기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이는 망국의 한과 애통함이 서려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사는 이들에게 역사는 곧 훈계인 동시에 거울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친일행적과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를 모으는 데 평생을 바친 심정섭(71) 씨. 그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잊혀 가는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50년 가까이 독립운동 자료들을 모아왔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그들의 행적을 알리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친일 사료를 모으고 공개하는 일은 민족정신 구현과 후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에요.”

그가 모은 사료는 총 5000여 점에 달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전쟁 비용을 마련하려고 발행한 국채, 군수품 공출명령서, 소작료 보고서를 비롯해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친필 서신과 친일 잡지 등 모두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 사용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20대 시절 사진과 김구 선생에게 직접 받은 사진과 회고록, 회중시계도 독립기념관에 없을 만큼 희귀한 자료들이다.

특히 지난 2004년에는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 공로자 명감’을 공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완용, 송병준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한 353명의 이름과 친일 행적이 소상히 기록된 이 책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회수해 폐기하거나 수록 당사자와 후손들에 의해 숨겨져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공개되지 않았던 희귀본이다.

심씨는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일제강점기 도서류와 신문, 서간 등 근현대사 자료 3300여 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러한 뜻깊은 일을 하는 기관이라면 그동안 모은 자료를 줘도 되겠다는 생각에 기증하게 됐죠.”

그가 이렇듯 평생을 역사 자료 수집에 공을 들인 이유는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가족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 1946년 백강 외조부가 환국한 후 고향인 순천 주암면 한동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부터 외조모 정동현 여사, 외조부 백강 선생이며 뒷줄 왼쪽부터는 큰 외숙 내외와 외사촌 그리고 어머니와 5세 때의 심정섭 씨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심씨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백강 조경한(1900~1993) 선생의 외손자이다. 그의 모친은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이유로 일제 순경에게 탄압과 고문을 당했고 해방 이후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외조부와 모친을 보고 자란 심씨였기에 역사적 자료들을 찾는 일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1956년 중학교 1학년이었던 심씨는 우연히 광주리 속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책 속에서 자신의 외조부인 백강 조경한 선생의 사진을 발견했다.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대동평론’이라는 잡지였다. 이때부터 그의 사료 수집 여정은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잃어버린 자료를 모아 독립운동 연구를 해보라”는 외조부의 말씀을 마음에 품었던 그였다. 백강 선생은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척결하고 독립운동가의 공로를 알리려 사료 수집을 해왔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애써 모은 자료가 모두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이러한 외조부의 영향으로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는 사료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고 고등학생 때까지 모은 자료가 이미 1000점에 이르렀다.

“대구나 부산 등 연락이 닿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갔죠. 주로 헌책방과 고물상에서 많은 자료를 얻었어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소상히 밝히고 올바른 것을 후대에 전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수집해왔죠.”

심씨는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로 현재까지 15권의 책을 발간했다. 내년 4월 13일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에 맞춰 ‘일제의 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일제강점기 순사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새로운 자료집도 출간한다. 그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가 모아온 사료들은 단순한 역사적 증거물이 아니에요. 일제 식민지 지배에 맞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무엇보다 친일‧반민족의 숨겨진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되죠.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 백범 김구 선생이 1943년 3월 30일 심정섭 씨의 외조부인 백강 조경한 선생에게 임시정부 총무처 차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임명장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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