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나라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종교가 살아야 사회와 나라가 산다’는 말이 그 답일 것이다. 지난번 글에 이어 시국미사에서 밝힌 박창신 원로신부의 시국발언을 시작으로 온 나라는 찬반시위로 이어지며 혼돈의 극치를 연출하고 있음을 재차 꼬집고자 한다. 마치 독립 후 신탁과 반탁이 온 나라를 혼미케 하던 때와 70~80년대 색깔론이 준동하던 때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때를 놓칠세라 북한 종교단체까지 가세해 “성전에 나서라”며 남한의 반정부투쟁에 나설 것을 선동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정부를 포함한 실종된 정치와 종교 내지 종교지도자들의 무지가 빚어낸 당연한 결과다.

지난 1일에는 감사원장 후보자 인준안이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처리된 후, 경색된 국회를 정상화하기 위해 여야 4당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시간, 박 대통령이 감사원과 검찰조직의 안정과 기초연금파동수습 등 국정혼란을 줄여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김진태 검찰총장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는 점도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또 가관인 것은 문재인 의원의 발언과 행보다.
 
남북정상회담 NLL발언 회의록 사건과 관련 직접 ‘참여정부의 불찰’이라며 공식 사과와 함께 일단락된 내용에 대해 다시 박근혜정부 비판과 색깔론으로 여론몰이하며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그의 한심스런 행보가 다시 주목 아닌 주목을 받고 있다.

정치가 국민을 속이고 가르치려 하는 시대는 구시대 유물이 된 지 오래가 아닌가. 언제까지 미련한 처세로 국민들을 우롱할 것인가. 현명한 지도자라면 국민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국민의 생각을 따르는 자일 것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곤란한 때 즉, 정치와 종교가 뒤범벅 된 혼돈의 시대를 맞아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정론직필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먼저 박창신 신부의 시국발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와 함께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등 국민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남북이 사상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자유를 진정 누릴 수 있으려면 자유와 자율을 구분할 줄 알 때,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는 점도 함께 인식돼야 한다.

종교지도자로서의 측면에서도 가르치고 일깨우기보다 선동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더욱더 아쉬운 것은 종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교훈처럼 자신의 역할 즉,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의 현실을 놓고는 얼마나 고민하고 선동해 봤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자기 역할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그 간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포장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시국을 활용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의식 있는 종교인과 국민들을 우롱하는 처사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일제 식민치하에서도 분명히 종교지도자 33인(기독교 16, 천도교 15, 불교 2)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이 일어선 것도 사실이고, 역사적으로 볼 때 나라가 위급할 때 나라를 지켜낸 것은 종교인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국민이 곧 종교인이며, 종교인이 시대마다 백성이요 국민이었다는 사실쯤은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이쯤에서 신앙이 주는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성서에 근거해 들려주고 싶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마 14:4)”는 한 구절 속에는 오늘날 이 시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이천 년 전 세례요한의 사명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주 곧 예수의 길을 예비하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라는 준엄한 사명을 받은 사명자였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고 세상사를 간섭하다가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마 14:3)”의 내용처럼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여기서 얻을 교훈은 자신의 역할이다. 세상보다 더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를 위해선 얼마나 기도하고 노력했는가. 신앙의 이름으로 얻은 명예와 권세를 세상과 하나 되는 통로로 삼는 참담한 종교현실을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운 시대를 살고 있다. 누가 누구를 책망하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세상의 부패는 곧 종교의 부패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심판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종교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 나라를 치리하는 치리자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묻고 싶다. 유교의 경전(사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삼경: 시경 서경 역경) 가운데 중용(中庸)이 있다. 이 중용의 가르침은 지나치거나 덜함이 없는 평상(平常)의 상태를 뜻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행동 원칙이며, 특히 치리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자 기본 원칙으로 못 박고 있다. 자신을 반대하고 헐뜯는다 해서 평정심을 잃는다면 이미 치리자로서의 자격을 놓고 국민들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제 계사년 뱀의 해도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뒤돌아보며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은 받아들여 2014년 갑오년 청마의 해를 기쁨으로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