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국민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대접을 충실히 받고 있는가를 따져 물었을 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밝히고 있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항)’로 되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헌법상의 조문이며, 최고규범으로서 상징성을 지니는 문제다.

헌법 가치에 따라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국민이 대통령과 입법부를 구성하는 국회의원을 제도적으로 정한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하기 때문에 국민의 위임에 의해서 그 권한을 가진 정치지도자들의 정상적이고 정당화된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국민이 숱하게 경험하고 보아왔듯이 정치지도자들이 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뜻에 따라 대한민국을 올바르게 이끌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다.

이 땅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이 명문화된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 역대 정권은 국민의 머슴이 되겠노라 명세했지만 국민 위에서 상전 노릇을 해왔다. 권력자들이 국민을 하대(下待)했던 자유당, 유신시대, 5공화국 등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바 있거니와 그 이후 문민 정권에서도 대한민국이 분명 ‘국민이 지존이어야 할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위임자들보다는 위임받은 자들이 설친 사회였으니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한 세월이기도 했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던 참여정부 초기에 나온 슬로건은 말장난으로 끝이 났고, 이명박정부에서 ‘국민을 섬기겠다’는 슬로건도 통상적으로 해보는 소리에 불과했다. 또한 박근혜정부의 ‘넓게 듣겠다’거나 ‘바르게 알리겠다’는 국정홍보 슬로건이나 ‘국민이 행복한 사회’라는 캐치프레이즈도 결국 국민이 주인임을 강조하는 말이긴 해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국민에게는 피부에 닿지 않는 말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데 그 요체가 바로 정치의 불안 때문이다.

새 정치를 하겠다는 공약은 지난해 총선 때와 대선에서 나온 단골 메뉴였다. 정치인들이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자기당의 잇속을 위해 당리당략으로 편 가르기 하는 등 구태 정치로 인해 상처받고 정치 불신이 만연했고, 그러한 때에 오로지 국민을 위해 진정한 새로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안철수 신드롬’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후보들이 건전한 지방자치를 위해 지방선거에서 ‘기초단체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하여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정치가 구현될 것으로 기대와 환영을 했던 것이다.

어느 선거에서든 정당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모든 정치제도가 중앙정치 위주이고 국회의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현 제도 하에서, 더군다나 기초단체 정당공천 과정에서 현직 국회의원의 입김이 좌지우지하고 특정지역에서 공천이 바로 당선과 이어지는 현실에서는 기초단체장·지방의원 후보자들이 해당 국회의원의 먹이사슬로서 격하(格下)되고 있는 것은 제도가 만들어낸 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문제점이 오랫동안 지속된 기초단체의 먹이사슬형 정당공천제도는 그 장점보다는 병폐가 훨씬 더 많아 지방자치의 건전한 발전과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에 예속물로 만드는 원천이 됐다. 그러함에도 그 제도를 마땅히 고쳐야 할 국회의원들은 그동안 맛본 기득권의 꿀맛을 놓치기 싫어 온갖 구실로 ‘제 밥줄이 떨쳐내기’ 국민 여론에 항거하면서 차일피일하고 있고, 폐단 많은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도 이 문제에 대해선 묵언 수행 중이다.

그나마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민주당이 당원 투표에 붙여 기초단체 정당공천제 폐지를 당론으로 확정하고, 얼마 전 새누리당에 대해 4인협의체 구성과 함께 현안 중 하나로 기초단체 정당공천 폐지를 위시한 정치 개혁 문제를 논의할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은 대선 공약 지키기의 좋은 사례다. 늦게나마 기초단체 정당공천문제 등 현안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제가 됐음에도 여당이 시도한 황찬현 감사원장 임명동의안의 단독처리 등으로 다시 장벽을 맞았다.

내년 6월 4일에 실시되는 지방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기초단체 정당공천제도’의 폐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다. 그리고 전국기초단체장·의회 협의회와 민간단체에서는 폐지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이 문제에 대해 주도적으로 해결할 책임이 있는 여당에서는 변명과 시간끌기로 아직 당론마저 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나라에서 국민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밥그릇 지키기’에 몰두한다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새누리당은 대선 공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야 국민과 약속한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누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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