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그 작고 아름다운 섬도 힘이 없으면 지킬 수가 없다. 역사보다 더 큰 거울이 있을까. 128년 전 거문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오늘을 다시 생각해본다.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시속 60km로 매우 빠르게 거문도를 향해 달렸다. 갑판에 서서 멀어져 가는 여수를 자세히 보려고 하니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을 덮어 시야를 가린다. 습한 바람에 염분까지 섞여서인지 미역처럼 쩍쩍 달라붙는 머리카락들. 그래도 배 안보다는 바다가 보이는 갑판이 좋다. 마음의 바다는 하루에도 열두 번 출렁대며 변덕을 부려도 하늘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는 웬만해선 요동치지 않는다. 잔잔하며 고요하다. 그 변치 않는 자연의 영속성에 눈과 마음이 끌린다. 여행을 하는 묘미이리라.

망망대해의 넓은 품에 안겨 하염없이 푸른 물결을 바라보기를 2시간 남짓하면 초도, 손죽도, 나로도를 지나 어느덧 거문도 고도에 도착한다. 

▲ 거문도

거문도는 고도, 동도, 서도의 섬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이다. 원래는 고도라고만 불렀다. 또 왜구는 왜도, 19세기 영국군은 포트해밀턴, 중국인들은 거마도라고 불렀다. 지금의 명칭은 학식이 높았던 선비 ‘귤은 김유’가 이 섬에 산다하여 거문도(巨文島)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귤은 김유는 조선말 여수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거문도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했던 선비다.

거문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속해있다. 여수에서 114.7km, 고흥 녹동항에서는 58km 거리에 있으며 제주도에서 110km 떨어져 있다. 섬에 차를 가져가고 싶을 때는 녹동항을 이용하면 된다. 거문도가 관광지로 유명 하지만, 같은 행정구역 여수지역민도 선뜻 가지 못하는 곳이 거문도라고 한다. 멀기도 하거니와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큰 마음먹고 거문도여행을 계획했다면, 그 섬에서 유명한 해풍쑥, 갈치조림 등의 먹거리와 백도, 거문도등대, 녹산등대, 영국군묘지 등의 볼거리를 배 시간을 고려해 알뜰살뜰 챙기는 것이 좋다. 대부분 여행객들이 거기까지는 한다. 하지만 더욱 크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거문도의 현재가 아닌 과거에 있었다.

우리만 몰랐던 천혜의 해양 요충지 거문도

거문도에서 맞이하는 새벽, 바다와 섬을 뒤덮은 해무는 어둔 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창 너머의 칠흑보다 더 짙게 주변을 포위하는 듯했다. 19세기 조선을 에워쌌던 제국주의 열강들처럼 말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음산하고 스산함에 일그러지는 표정을 지으며 육지인 티를 팍팍 내는 순간에도 작은 배들은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역시 부지런한 어민들이다.

 

짙은 안개로 일출을 찍지 못한 채 고도의 포구를 지나갈 때, 고기잡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배인지 한 어민이 밧줄을 던져주며 삼각뿔 같이 생긴 돌에 걸어달라고 했다. 얼떨결에 뛰어가 밧줄을 걸었다. 어민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외지인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가는 거문도 사람들. 128년 전 섬사람들도 파란 눈의 영국 군인들에게 그랬던 것일까.
1885년 4월 15일, 영국군함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느닷없이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다. 주권국인 조선에는 사전에 어떤 동의나 양해도 없이 말이다. 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청나라와 일본에는 각각 거문도 점령 사실을 알렸다. 조선에는 무단 점령 25일이 지난 5월 15일에 청나라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뿐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세기 초강대국이자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에게 ‘거문도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국제사회에서도 대외명분 또는 국제여론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은 강대국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 힘없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고려될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은 무력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추구했으며, 강대국의 무력 앞에 대응할 힘이 없었던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조선인들조차 잘 알지 못했던 작은 섬을 타국에 빼앗길세라 한시가 급하게 선점코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거문도를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것은 1845년 영국군함 사마랑호의 항해기를 통해서다. 사마랑호는 해양탐사가 주목적이었던 관측선으로 제주도에서 거문도 해역까지 약 1개월간 해안 탐사를 끝내고 거문도를 ‘해밀턴항’으로 명명하며 관심을 보였다. 1866년 미국의 아시아함대 슈펠트 제독도 거문도를 방문, 지중해의 요충지 지브롤터에 비유하며 거문도가 동아시아 해군기지로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거문도는 동도, 서도, 고도가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내해가 형성돼 있다. 거문도의 내해는 지금도 태풍이 불면 어선들이 풍랑을 피해 집결하는 곳이다. 파도가 일지 않으면서도 수심이 깊어 선박의 입출항이 자유롭고, 유사시에 요새처럼 배들의 자취를 감춰놓을 수 있는 곳이다. 또 계곡이 있어 식수, 야채 등의 공급이 가능하다. 19세기 지정학적으로는 홍콩과 나가사키에 함대를 주둔해둔 영국에게 두 지점을 잇는 중간기지로서 제격인 곳이 거문도였다. 러시아가 남하했을 경우에도 블라디보스톡으로 밀고 올라가기 위한 유리한 공격거점이기도 했다. 19세기 국제 관계는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였다. 따라서 영국은 부동항을 찾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한다는 핑계로 거문도를 단숨에 점령했던 것이다.

박미혜/ me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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