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지난 8월초. LPGA 브리티시 오픈을 앞두고 SBS 스포츠 프로듀서가 연구실로 카메라 기자와 함께 찾아왔다. 박인비의 ‘캘린더 그랜드슬램’의 가능성과 전망을 취재하기 위해서이다.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LPGA 챔피언십, US오픈에서 우승한 박인비는 브리티시오픈까지 석권하면 한 시즌 메이저대회 4개를 휩쓰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의 대기록을 달성하게 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던 터였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박인비의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기록의 가능성을 점쳤다.

하지만 필자는 인터뷰에서 “아마도 이번 대회 우승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본인이 그랜드슬램을 이뤄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을 갖고 임하게 돼 정상적인 경기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박인비가 브리티시 오픈에서 내심 잘 해주기를 바랐지만, 인터뷰선 선수의 심적 부담이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골프의 특성을 고려해서 말을 했던 것이다. 박인비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미 한계 상황을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 것이 이유였다. 그의 그랜드슬램 도전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정상 뒤에 찾아온 슬럼프는 제법 오래갔다. 박인비는 브리티시오픈이 끝난 뒤 마지막 메이저대회로 불리는 에비앙 마스터스 대회서는 경기 중 볼을 건드려 벌타까지 받으며 악전고투를 한 끝에 공동 67위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여러 대회에서 들쑥날쑥하는 경기력으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박인비는 메이저대회 포함 올 시즌 6승을 거둬 이미 따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던 올해의 선수상까지 추격자인 수잔 페테르손(노르웨이)에게 쫓기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지난 주말 벌어진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날에서 4위에 올라, 5위의 페테르손을 따돌리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했다. 조금 늦게 찾아왔지만 올해의 선수상을 거머쥔 것은 한국여자골프로선 크게 경사스러운 일이다. 골프의 변방으로 시작해 박세리의 LPGA 정상을 신호탄으로 여러 유망주들이 세계적인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우승대열에 합류하며 세계무대를 제패한 지 15년여 만에 박인비가 한 시즌 실질적인 세계무대를 평정한 선수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올해의 선수에 오르기까지 그의 땀과 인내, 정신력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박인비가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LPGA 우승이라는 것이 언제든 들어왔다가 나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브리티스 오픈 이후 찾아온 슬럼프를 통해 승부의 냉혹함을 잘 맛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샷이 잘 갖추어져 있고, 모든 여건이 좋다고 하더라도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겨루는 LPGA는 한 번의 실수로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프로골퍼의 비정한 승부의 세계인 것이다. 박세리, 박지은, 김미현 등 선배들이 한때 세계 정상을 호령하다가 밀려난 것은 정상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박인비가 앞으로의 도전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계속 보여주려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절대 지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한 선수로서 잠시의 여유를 보이며 느긋한 자세로 선수생활을 했다가는 경기의 집중력을 잃고 곧바로 경쟁자들의 강력한 대시에 노출될 수 있다.

지난 2008년 최연소 US오픈 우승 이후 수년간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낸 박인비는 다른 어떤 선수보다는 마인드 컨트롤이 뛰어나다는 강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여자골프에서 모처럼 등장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박인비가 세계 골프 퀸으로서 롱런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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