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TV 사극이 시작됐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여주인공의 목욕 모습이다. 여주인공이 목욕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면, 방송이 되기 전부터 인터넷 매체 등에서 호들갑을 떤다. 방송이 되고 나면 섹시미가 돋보였다니 하며 또 한바탕 난리를 친다.

막상 보고 나면 별 것도 아니다. 늘 해왔던 대로이고,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말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시청자들은 그래서 짜증이 난다. TV에서 무얼 바라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게 TV의 한계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방송들이 한심하다.

시청자들이 짜증을 내는 것은 여주인공의 목욕 장면이 별 볼일 없어서가 아니라, 별 것도 아닌 걸 별 것인 양 소문을 내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다. 여주인공 목욕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시청률 때문이다. 노이즈 마케팅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시청자들은 거듭 ‘낚인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속살을 보여주면서 재미를 본 원조는 1999년 MBC TV ‘명의 허준’에서 ‘예진 아씨’로 등장한 황수정이었다. 그녀는 비를 맞아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는 흰색(투명색이라고 하는 게 맞다) 저고리를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그 덕분인지 황수정은 스타 반열에 올랐고 드라마도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2001년 SBS TV ‘여인천하’의 강수연도 목욕 장면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 강수연의 목욕을 돕는 시녀 권은아도 함께 벗고 나와 전에 볼 수 없었던 희한한 장면을 연출했고,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몇 차례 더 목욕 장면이 등장했다. 덕분에 시청률이 50%나 되는 등 드라마가 히트했다.

2002년 KBS 2TV ‘장희빈’에서는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김혜수가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쉼 없이 목욕 장면을 보여 주었다. 남녀 혼욕 장면도 내보내는 등 과감하고 거침이 없었다. ‘에로 장희빈’이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시청률 끌어 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2003년 ‘다모’를 비롯 이후에도 여주인공의 목욕 장면은 사극의 필수 항목처럼 되어 버렸다. 김태희, 이다원, 박민영, 이보영, 이다해, 문근영, 문채원 등 사극에 등장한 모든 스타 여배우들이 목욕 장면을 찍었다. 최근에는 MBC TV ‘기황후’에서 하지원 등이 속살을 자주 드러냄으로써 역사 왜곡 논란과 함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극이 새로 방영되기 시작하면 사극의 핵심이랄 수 있는 역사적 사실 관계 등에 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린다. 대신 여주인공의 목욕 장면이 더 화제가 된다. 드라마가 궁극적으로는 허구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할 경우에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러한 관점에서의 논의는 이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조선왕조 오백년’ 같은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을 탄탄하게 깔고 극을 진행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자료적 가치가 있었다. 드라마적 구성을 위해 다소 허구가 섞였을 터이지만 큰 맥락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고 덕분에 평소 드라마를 보지 않던 중년의 남성 시청자들이 TV 앞에 붙어 앉을 수 있었다.

요즘은 사극이라고 하는 것이 무늬만 사극이지 실상은 판타지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제대로 역사 교육을 받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궁중에서 입는 화려한 때때옷을 입고 산 줄 알 것이다. 영화 ‘관상’을 먼저 보고 나온 친구들이 “김종서가 죽고 수양이 임금이 된다”고 말하는 바람에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스포일러가 되었다는 게 요즘 역사 교육의 현실이다.

여주인공의 속살 대신, 역사의 속살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착한 사극이 많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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