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남달리 총명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의심이 많다. 모든 것이 과유불급(過猶不及)이지만, 통치자는 의심과 신뢰 사이에서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수(隋)의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창업군주였던 만큼 대단한 능력자였다. 그는 신뢰하던 고경(高熲)에게 대정(大政)을 위임했다. 뛰어난 통찰력과 갖가지 권술을 지녔던 양견은 이상하리만큼 고경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고경도 충성을 다해 국정에 임했으므로 수 왕조는 상당한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전제정치에서 군신지간에는 언젠가 의심이 움튼다. 고경은 정직하고 성실했다. 그러나 군신지간에 일어날 수 있는 모순을 주의하지 못했다. 양견의 신임이 두텁기도 했지만, 자신의 충성심과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진심이면 상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단점이 있다. 순수한 것은 좋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고경은 사안마다 과감한 결단을 내렸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제의 주변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고경에게 치우친 양견의 총애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었다. 양견에게 점차 고경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라는 말이 있다. 산중에 있어야 할 호랑이가 시장에 나타날 리가 없지만,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그것을 사실로 믿게 된다는 뜻이다. 총명했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황후 독고(獨孤)씨는 유달리 질투가 심했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양견은 다른 여자에게 눈길도 주지 못했다. 황제가 된 양견은 울지형(尉遲逈)의 손녀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독고황후가 좌시할 리가 없었다. 황후는 문제가 조정에 나간 틈을 이용하여 그녀를 살해했다. 대노한 문제는 황후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못하고 혼자 말을 타고 궁에서 나가 산골짜기를 뛰어다니며 울분을 삭였다. 고경이 따라가 간신히 달래서 궁으로 데리고 왔다. 문제는 부자유한 신세를 한탄했다. 고경은 아녀자 때문에 천하를 버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고경은 황제 부부 사이를 좋게 만들었다. 황후도 고경을 좋게 평가했다. 그러나 나중에 고경이 자신을 가리켜 아녀자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화를 냈다.

태자 양용(楊勇)은 황제 부부의 골칫거리였다. 틈을 노려 차남 양광(楊廣)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태자를 폐하고 양광을 세우려던 양견이 고경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기에서 고경의 순수하고 충직함은 문제로 변했다. 그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들먹이며 멀쩡한 태자를 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직언했다. 양광과 독고황후는 고경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이 무렵 양견은 동궁의 무사들 가운데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황궁을 호위하게 했다. 고경이 다시 적극적으로 반대하자 문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경의 아들은 양용의 사위였다. 양견은 그 때문에 고경이 태자를 옹호한다고 생각했다. 고경의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자, 독고황후는 문제에게 새로 아내를 얻게 하라고 권했다. 아내를 사랑했던 고경은 한사코 사양했다. 마침 고경의 애첩이 아들을 낳았다. 독고황후가 양견에게 대들었다.

“고경을 왜 그렇게 신임하십니까? 폐하도 첩을 얻고 싶습니까?”

문제도 문득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고경을 계속 신임했다가는 황후로부터 엄청나게 잔소리를 들을 것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문제가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고경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다가 일단 결정이 나자, 충실한 사람답게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수군은 소득도 없이 돌아왔다. 독고황후는 고경이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양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원정군 사령관은 한왕(漢王) 양량(楊諒)이었다. 책임이 두려웠던 그는 고경이 자기의 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했으며, 자기를 죽이려도 했다고 모함했다. 지난날의 양견이었다면 아무리 아들의 말이라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의심이 들자 아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고경은 파면되고 말았다. 미안했던 양견은 고경을 잔치에 초대하여 ‘짐은 공을 등지지 않았는데, 공이 스스로 들을 돌리고 말았다’고 발뺌했다. 의심이 의심을 낳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한 나라의 군주가 평범한 사람처럼 오락가락했다가는 나라를 잃고 국민들을 괴롭히게 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