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왜곡의 역사는 흐른다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가사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신라장군 이사부
백결선생 떡방아 삼천궁녀 의자왕
황산벌의 계백 맞서 써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가사

▲ 고란사 낙화암 위에 있는 절.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이 있으며, 그 위쪽에 바위틈에 고란초가 나 있다. 원래 절이 아니라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도 전해진다.

천 명의 후궁을 뒀다는 솔로몬보다 세 배나 많은 삼천 궁녀를 거느린 의자왕. 백제 역사는 몰라도 의자왕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방탕군주, 한량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가 부른 백마강이란 노래에서 삼천궁녀가 등장해 대중들의 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됐고, 자라나는 새싹들이 부르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도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함께 등장한다. 그러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한번쯤은 ‘궁녀가 삼천 명이나 되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긴 해도 생각은 거기까지, 패망국의 마지막 왕이 허랑 방탕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궁녀들이 투신했다고 알려진 낙화암 고란사라는 절에는 삼천궁녀를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은 또 얼마나 사실적인가. 치마를 뒤집어쓰고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궁녀, 떨어져야할 순서가 다가오자 뒷줄에 서있는 궁녀와 부둥켜안고 눈물짓는 궁녀, 뒤에선 번뜩거리는 칼을 들고 신라 군사들이 쫓아오는데….

그런데 그림 속에서도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줄서서 기다리기엔 낙화암 면적이 좁아 보인다. 실제 낙화암도 그렇고.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삼천궁녀를 아무런 의심 없이 역사의 한 장면으로 생각해온 것은 아닐까. 만약 의자왕이 삼천궁녀의 치맛바람에 휘둘렸던 것이 아니라면, 실추된 의자왕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해야할까. 또 백제가 망한 진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에 대해 ‘훌륭하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효로서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해동의 증자(공자의 제자 중 효성과 우애가 깊었던 제자가 증자임)라 불리었다’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의자왕과는 사뭇 다른 기록들이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은 재위 20년 동안 신라를 10여 차례 공격하고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660년 멸망하기 1년 전까지도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을 만큼 정복활동에 여념 없는 군주였다.

의자왕에 대한 진면모가 가리어져 있었다는 것은 그의 왕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왕의 시호는 왕이 죽은 후에 사가에 의해 붙여지는데 의자왕은 의롭고(義) 자애로운(慈) 왕이란 뜻이다. 의자왕이 알려진 대로 방탕군주였다면 그와 같은 왕명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사비천도를 단행했던 성왕을 거룩할 성(聖)을 붙여 떠받드는 것처럼 의자왕 역시 성왕만큼이나 백제중흥과 한성 고토 회복을 위해 공을 세우며 백성들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왕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삼천궁녀는 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조선시대 문인 민재인 선생의 시어 중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며 후궁들의 고운 얼굴에 눈이 어두웠네’라는 표현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즉, 시어에서 비롯된 표현이 대중가요 속으로 들어가 구전으로 이어지면서 ‘역사’로 자리를 굳혔던 것이다. 백제의 멸망이 의자왕의 인간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백제는 왜 망한 것인가.

미혜/ me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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