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것이 없고 성한 것이 없다’는 말이 썩 어울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표적으로 언론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언론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누워 침 뱉기’는 아닌지 조심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언론은 제 기능을 이미 상실한 지 오래다. 독자에게 알권리를 제공하는 사명도 감시의 역할도 오피니언적 기능도 속절없이 퇴색되고 변질돼 버렸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노선에 우롱당하고, 돈과 권력에 종노릇하며, 독자와 국민을 속이면서까지 부패와 타락된 세상의 선봉에 서 있다.

그 틈을 교묘히 파고 들어온 포털사이트는 변질된 언론의 행태를 능수능란하게 유린하며 언론을 포털에 노예화 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포털사이트는 ‘정보검색 서비스’라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언론의 역할마저 침식시키며 인터넷 강자로 등극해 거대한 권력으로 자리매김했으니, 그렇게 되기까지의 일등공신은 바로 언론인 셈이다.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교훈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사회와 나라 어디에도 언론은 없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지만 옛 말이 되고 추억이 되었다.

언론은 그 시대를 보는 눈이며, 한편으로는 비추는 등불이요 길잡이라 할 것이다. 눈이 망가지고 등불이 빛을 잃었으니 이 사회와 나라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쯤에서 ‘위기가 곧 기회다’는 말을 한번 떠올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미 변질돼 버린 언론이라 할지라도 살아날 구멍은 있지 않을까. 그것은 다시 태어나 곁길이 아닌 정도를 걸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진리부터 깨닫는 것이 순서일 게다. 그러한 의미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불교사상에 보면 중도(中道)라는 이론이 있다. 지난 정권이 바로 중도라는 슬로건과 함께 출범한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지난 정권 초기 통합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중도는 우도 좌도 아닌 가운데를 뜻하거나 모두를 수용한다는 애매모호한 의미로 연결시킨 것이 아닌가 우려해 보면서, 과연 중도의 의미가 그처럼 회색분자가 걷는 길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중도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가운데를 택하는 게 아니라,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옳고 바른 쪽을 택해야 하고 좇아야 하는 절대적 가치며 도인 것이다. 따라서 중도는 곧 진리요 진실이요 정의로 귀결된다. 바로 이 시대 언론이 가야 할 길인 중도인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보도에 팩트(사실 또는 사건)가 기본임에도 팩트를 다루면 특종이 되니 이 시대가 얼마나 모순되고 거짓된 세상에 길들여져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다수결 원칙과 문화는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지탱하고 유지해 가는 하나의 수단이지 진리와 진실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부정과 부패와 타락을 주도하는 기득권을 가진 다수가 누리는 다수문화는 언론에까지 깊숙이 영향을 미치며 이 시대 사회와 나라 나아가 종교가 권력이 되는 데 한 몫을 톡톡히 해 왔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 할 것이다. 즉, 다수에 의한 다수결은 오늘날 진리와 진실과 정의 위에 군림하는 위력(威力)과 같은 사회악을 견인하며 중도를 훼방하고 가로막는 걸림이 되고 만 것이다.

또 유가 사상 중에는 중용(中庸)이 있다. 이 중용은 유교의 논어․맹자․중용․대학이라는 사서(四書)와 시경․서경․역경(周易)이라는 삼경(三經) 즉, 사서삼경의 하나로서 남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 ‘절제의 철학’을 의미하며,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상태(평상의 상태유지)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행동 원칙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칙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중용은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평정의 상태를 자랑하고 있으니 중용은 곧 중도가 가능하게 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중심을 유지하는 평정의 상태가 깨지고 무너지면 욕심이 잉태되니 중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진리 또한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사도 바울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교훈을 함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교와 유교의 사상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성서에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는 가르침이 있는 걸로 보아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중도 곧 진리와 진실, 정의를 의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정의는 바로 종교로부터 비롯됐으니, 언론이 가야 할 길도 종교적 정의관으로 회복될 때 비로소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답을 얻게 한다.

오늘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이 시대를 향한 경종의 소리와 함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는 진리의 메시지로 깨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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