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25. 신약의 약속대로 추수된 적이 있으며, 인 맞은 적이 있으며, 12지파에 속한 적이 있으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한 적이 있는가? 이것이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

[SOSTV 생애의 빛]

지금은 추수의 때이다. 세상 끝 추수 때를 향한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자.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들은 들으라(마 13:36~43)’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세상 끝에 일어날 엄숙한 추수사업에 대해서 예언하셨다.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 초림 시부터 재림 시까지 기독교 역사 2000년 기간의 복음 사업에 대해 예언하신 비유이다. 예수께서 초림하여 오셔서 이 세상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다. 복음은 발아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나 사탄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핍박과 고문으로 복음의 확장을 막아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사탄은 기독교회 내로 들어와 가라지를 뿌려댄 것이다. 그 가라지가 바로 현재 기독교회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취하게 만든 비진리들이다.

성경에도 없는 ‘원죄설’ ‘예정설’ 그리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은혜의 복음.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해졌다’는 무법주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원수 사탄이 기독교에 뿌려놓은 가라지들이며 이러한 가르침들 때문에 기독교회가 바벨론화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은 마지막 추수 때에 당신의 추수천사들을 보내시겠다고 예언하셨다. 그런데 그 추수천사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비유를 다시 살펴보자.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중략)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마지막 때 추수천사들이 하는 일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가라지로 분류해 내는 일이다. 불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명백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마지막 추수사업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이 바로 마지막 시대에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기준이 됨을 말씀은 알려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지키는 자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쳐지며, 하나님의 계명을 거절하고 짐승의 계명을 따르는 자들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 맞은 12지파 14만 4000인의 특징을 계시록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이 말씀을 보아서도 하나님의 인 맞은 알곡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임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 추수사업은 하나님의 밭(교회)에서 벌어질 것인데, 십자가로 온전히 거듭나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알곡으로 분류된다. 그들이 바로 최후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하는 자들인 것이다.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주님의 낫을 보내어 거두소서. 이는 땅의 수확물이 익어 주님께서 거두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니이다(계 14:15, kjv)’ 그 후 ‘구름 위에 앉으신 분께서 자신의 낫을 땅위로 던져 보내시니, 땅에서 거둬 들여지니라(계 14:16)’ 이러한 말씀은 마태복음 13장 39~43절까지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다. 땅의 알곡들은 천국 창고에 들어가게 된다.

독보리들은 모아서 불속에 태우는 것 같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자기의 왕국으로부터 가려내어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던져 넣는다. 이들은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 불법을 행하지 않는 알곡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예리한 낫을 보내어 거둬들인 포도송이는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즙 틀 속에 던져 넣어 도성 밖에서 짓밟히리라(계 18~20).

신명기 32장 32절에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 밭에서 나온 것이라. 그러므로 그들의 포도들은 쓸개의 포도들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이 없는 종교가 구원 받은 백성들 보다 더 설치고 있는 세상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래 왔던 일이다. 바벨론의 누룩으로 부풀려 있다. 순수한 포도는 발효되어 부풀지 않는다. 진리보다 과장 되게 말씀을 선포하는 곳은 구원이 없다. 이스라엘 땅에 간혹 선지자들이 있듯 구원 받은 백성도 섞여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용의 독이요, 독사들의 맹독이라(신 32:33)’ 하나님의 성령의 인침을 받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독사의 맹독과 부풀려 놓은 포도즙에 취하여 혼인 잔치에 참여도 못하고 있다. 취한 상태에 누구와 신방을 차릴 것인가 헛갈리고 있을 것이다. 누룩 없는 마음으로 죄를 자복하고 복음으로 거듭날 때 인침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때 이루어진다.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도다(엡 1:7)’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이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니, 이 믿음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성경을 복잡하게 풀어서 구원이 어렵다고 인식시키는 자들도 진노의 포도주에 속한 자들이다. 구원 받았으면 영으로 계신 그분을 알 것이다.

‘그 뜻에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단 한 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드리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있느니라(히 10:10)’ 거룩한 사람은 추수 될 것이며 12지파에 속할 것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 ‘말하기를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이르렀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계 19:6~7)’ 헛된 말장난에 넘어가거나 유혹 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 드리는 자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 드려야 할지니라(요 4:24)’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구원이란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구원을 쥔다든지 구원을 갖는다든지 하는 것은 인간이 성사시킬 수 없는 일이다. 신약에 나오는 모든 일들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진 일로 취급된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 사건이라고 한다. 언약적 사건은 시간의 진척과정으로 완성과 비완성을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대 안에 일괄적으로 갇혀 있는 신세인 인간들은 ‘부분은 전체를 모른다’는 원리에 따라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추수와 심판을 이해할 뿐이다.

따라서 오직 유일무이한 사건이 모든 말씀과 약속의 완성으로만 거론되고 그것만 증거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고 사도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다. 이 십자가 사건도 오늘도 쉬지 않고 인간적 시간 의식에 포착되지를 않고 반복적으로 순수 사건으로서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침투될 뿐이다.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문장에 나와 있는 시제는 모두 완료형이다. 즉 이미 ‘의롭게 되기’ 와 ‘영화롭게 되기’가 이미 하늘나라에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언약 완성) 완료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남은 것이 이 완성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 안에서 반복적으로 그 결과가 통보될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미 ‘혼인잔치 참여되기’가 완성되었기에 성도는 ‘혼인잔치’에 참여될 것이다. 마치 구원이 되었기에 구원에 참여할 날이 남아있고(고후 1:10)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언약을 완성했기에 재림이 하실 일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원은 바로 이런 절차 자체를 두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소지할 입장은 못 된다. 그저 구원 작업에 참여될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고정시켜놓는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자신들의 죄악된 본성대로 움직임을 갖도록 하시면서 그 와중에서 뿜어져 나오는 죄를 겨냥하면서 복음과 연계시키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 이렇게 되면 성도만이 자신이 그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구원은 자신의 공로나 성과가 가미될 수 없음을 늘 한없이 고백하게 된다.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여러 차례 질문 자체가 합당치 않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본 질문 역시 그러하다. 신·구약 성경에서 성도가 추수가 된다는 식의 이러한 교훈을 주신 바가 없다. 마 9:37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라고 하셨고, 이어진 38절에서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는 추수를 비유로 하여 복음을 위해 헌신할 일꾼들과 관련된 교훈이지, 성도가 현실에서 추수되고 또 추수 할 것이란 뜻은 아니다.

마 13:30의 곡식과 가리지의 비유에서도 결론에서 추수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이 역시 비유이다. 곡식이 모두 익으면 추수를 하듯이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완성하시게 되면 그 때에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란 의미에서 하신 교훈이다.

막 4:27에서도 추수 때와 관련한 말씀을 하셨다. 이는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추수 때가 되기까지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 없듯이 믿음의 성장 역시 그렇다는 것을 교훈코자 주신 비유이다.

요 4:35에도 주님께서 추수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이는 마 9:37과 같은 내용으로 그 말씀을 하셨던 때는 추수기가 다 되었던 때였다. 주님은 추수기의 자연적 원리를 비유로 하여 제자들이 감당할 복음 사역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 시대는 구속사를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과정의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때문에 복음을 위한 진실한 일꾼들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였다. 때문에 주님은 추수 때의 바쁜 일정을 비유로 하여 복음전파에 절실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계 14:15, 16에서도 추수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곡식을 거두는 광경이 보도되었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와 관련하여 드신 비유이다. 이처럼 추수에 대한 말씀들은 개인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들이 아니다. 아울러 ‘추수된 적이 있는가?’라는 질의는 합당한 질문이 아니다.

‘인 맞은 적이 있으며, 12지파에 속한 적이 있으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한 적이 있는가?’란 질의는 계 7장 내용을 근거한 질문으로 여겨진다. 거기서의 12지파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구원받은 자들을 상징한 묵시로서, 신약의 성도들이 12지파에 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약시대는 신령한 이스라엘로 구약시대와 같이 육신을 조상으로 한 지파나 교회 공동체가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한다는 것도 구원에 이르게 된 상황을 비유한 교훈이지 성도가 지상에서 혼인잔치에 참예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구원에 이르는 중생에 대하여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말씀하신바 있다.

성령을 통해 거듭나는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추수되고, 인 맞고, 12지파에 속하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한 적이 있는가? 라는 이런 식의 질의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질문의 오류이다. 즉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질문과 같이 어떤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서 받거나 확인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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