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길 관장이 최승희 미공개 사진과 육필사진을 들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고산도 김정호와 닮은 삶, 40년간 전 세계 돌며 사진 수집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오는 18일부터 내달 6일까지 본지가 IBK기업은행 로비에서 개최하는 특별전시회에 사진 수집가이면서 발명가인 정성길(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 관장이 약 100점의 사진을 제공한다.

정성길 관장이 제공하는 사진은 그가 40여 년간 전 세계를 돌며 수집한 대한민국 근현대사 사진이라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는 사진들이다. 100년 전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시대 역사적인 순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 자료들인 것이다.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진행되는 강화도 조약 사진, 조선의 마지막 왕손 이구를 비롯한 왕족들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는 모습, 위안부로 강제 이송되는 여성들의 모습, 3.1만세운동 모습 등의 역사적 사건이 담긴 사진은 우리의 굴욕적인 순간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다시는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다짐하게 만든다.

또 전설의 무희 최승희 미공개 사진과 육필, 마지막 황태손 이구 어린 시절 미공개 사진, 우리나라 최초 성형 쌍꺼풀 여성 사진 등은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정성길 관장에게는 이 사진 외에도 7만 점이나 되는 기록사진을 갖고 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왜곡된 역사를 규명하고 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고자 사재(私財)를 다 털어 모은 숭고한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럼 정 관장은 무슨 연고로 사진을 모으게 됐을까. 그 시작은 그가 의사로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더 차원 높은 의술을 익히고 싶어 1974년 독일에 물리치료를 배우러 가면서부터다.

우연히 독일인 신부가 갖고 있는 우리나라 모습이 담긴 옛 사진을 발견하면서 그는 우리의 역사가 외국 사람의 손에 넘어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다.

워낙 귀한 사진들이기 때문에 모으는 데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집은 물론 운영하던 유리공장까지 파는 등 사재를 다 털었을 뿐 아니라 특허를 내서 벌게 된 돈 마저 사진들을 구입하는 비용으로 충당했다. 그는 지금까지 특허만 43개를 냈을 정도로 뛰어난 발명가다. 각종 대회에서 발명왕 상을 받기가 일쑤였다.

이런 그에게 더 큰 관심은 발명이 아닌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외국 선교사들이 찍어놓은 옛 우리 선조들의 사진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의 유족을 찾기 위해 몇 년이 걸려 수소문한 끝에 어렵게 찾아내 구한 사진들도 상당하다. 특히 일제의 만행이 드러나 있는 사진을 발견할 때면 그에겐 힘든 순간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에너지가 됐다. 일본의 우리역사 왜곡을 입증할 자료로 사용할 역사적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정성길 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정 관장은 “특허 하나 받는 것이 박사학위 따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런데도 나는 43개란 말이지.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왔는지, 이는 아무래도 조상의 은덕이 아닐까 싶다. 조상의 지혜가 자주 나에게 왔던 것 같다”며 이것 또한 힘든 길을 걷는 자신에게 위안이 됐다고 한다.

사진을 구하러 다니던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순간과 고비도 많았다. 비자도 없이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나라에 숨어 들어가 구하기도 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으로 잠입해 구하고 나오던 때였다. 당시 서독과 동독 간에는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은 수월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이 문제였다. 동독 정부가 서독으로 탈출하는 자국민들을 막기 위해 국경선에서 경비와 검문이 삼엄했다.

그는 “당시 오로지 사진에만 눈이 멀어서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자칫 간첩으로 오인 받으면 한국으로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커다란 트럭 짐칸에 몰래 들어갔다. 화물 검사는 사람 대신 경비견이 한다는 말을 듣고 국산 마늘을 잔뜩 먹고 옷에도 발라, 개의 예민한 후각을 속여 나올 수 있었던 적도 있다”며 당시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잠시 웃었다.

그렇게 하면서 7만장에 이르는 기록사진을 모았고, 유리원판으로 된 필름도 3500장이나 갖고 있다. 유리원판은 합성수지로 된 필름이 발명되기 전 1㎜의 유리판에 감광재료를 발라 사용하던 필름이다. 사재를 다 털어서 모으다보니 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힘든 시기가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사진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같이 모은 사진을 가지고 그간 홀로 직접 수많은 전시를 하면서 우리 역사를 알렸으나, 대다수가 그냥 단순히 사진을 보는 데 그쳤다는 점에 안타까워했다.

그는 자신을 고산도 김정호에 비유한다. 전국곳곳을 돌아다녀 ‘대동여지도’란 대작을 만들었음에도 그 가치를 당시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김정호처럼 그도 그러한 인생을 살았다는 얘기다. 그는 “염천교 부근에 김정호 선생의 비문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위안을 삼는다. 기록사진이 끊어진 역사를 이어주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평생 해왔던 일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기에 그의 숙명이었던 듯하다.

아울러 “역사는 기록 없이는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입증하지 못한다면 민족의 올바른 얼은 계승할 수가 없을 것”이라 강조했다.

▲ 정성길 관장이 이달 18일부터 개최되는 천지일보 특별사진전에서 처음 공개되는 사진들을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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