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진 수원보훈지청 복지과

 
지난달 26일은 대한국인 안중근의사 의거 104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이를 계기로 안중근 의사를 다시금 기억해보고자 한다.

안 의사는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이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있던 1879년 9월 9일 해주의 대지주인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구국의 의지를 불태우던 의사는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뜻을 두고 삼흥학교(土興, 民興, 國興)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 운영하는 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1907년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체결, 군대강제해산 등의 국난의 정세변동을 보자 계몽운동을 독립전쟁 전략으로 바꿔 의병부대 창설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을 하여 이 지역의 한국인 유력인사인 이범윤 등과 의병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 부대가 곧 이범윤부대로 압록강을 넘어 일본군과 수차례교전으로 승리를 거둔바 있다.

안 의사는 1909년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었다. 그의 약지가 잘린 수형은 이때의 단지로 말미암은 것이며 단지동맹은 의병재기의 징표였다. 의병재기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이등박문이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1909년 10월 26일 9시경 하얼빈역두에서 이등박문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네발을 쏘고 그의 얼굴을 확실히 몰라 같이 있던 자들을 향해 3발을 더 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으로서 거사의 성공을 알렸다.

재판과정에서 자신은 한국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등박문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안 의사가 의병활동 시절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여 준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이등박문의 처단은 그 자체가 독립전쟁의 일환이며 자신은 일개 죄인이나 자객이 아니며 단지 포로가 된 것임을 주장하나,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에게 모든 국권을 빼앗기고 허울뿐인 나라였으니 결국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그동안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높이 평가받아왔으나 이등박문을 처단한 의거에만 치우침으로써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점이 있다. 그가 활약하던 시기에는 의병과 계몽운동, 그리고 외교 및 의열투쟁 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안 의사는 이 모든 범주의 구국운동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따라서 그의 앞선 계몽운동과 의병활동 그리고 법정투쟁 등 그의 사상과 철학을 알지 못하고는 이등박문의 처단이 구국과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

당시 동양의 약소국가들이 안 의사 의거를 찬양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 이 의거를 연일 대서특필 한 점이나 중국이 여순감옥을 ‘중국 항일투쟁의 기념관’으로 사용하면서 안내문에 ‘조선 저명 민족영웅 안중근이 이곳에서 사형되었다’고 한점이나 유물전시실에 중국 투옥자들 보다 4배정도 큰 면적을 할애한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신 안 의사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한번 되새겨보고 의사님께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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