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방한한 틱낫한스님이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대법회’ 참석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질문에 답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종교人 평화를 말하다-세계적 평화운동가・명상지도자 틱낫한스님[1]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살아있는 부처(生佛)로 불리는 틱낫한스님은 베트남 출신의 승려이자 명상지도자이며, 세계적인 평화운동가다. 틱낫한은 한자 법명인 석일행(釋一行)의 베트남어 발음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힘과 용기를 얻고 있다.

1926년 베트남 중부의 행정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16살 때인 1942년 선불교에 입문해 승려의 길로 들어선다. 불교사상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 틱낫한스님은 ‘불교가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품고, 특히 민중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덜어주고자 힘썼다. 스님은 24세 무렵 베트남 최대의 불교연구센터인 인꽝(AnQuang) 불교연구원을 설립한다. 1956년에는 베트남불교도회의 주간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며 불교의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다가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며, 다양한 종교를 이해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반발 ‘반전평화운동’ 전개

1965년 자신의 조국, 베트남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틱낫한스님은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평화를 호소하는 강연과 운동을 전개한다. 또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한 사회청년봉사학교를 열어 봉사활동도 병행했다. 스님은 미국 유학 중 귀국하여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으로 반전운동을 펼치다 1966년 조국 베트남에서 강제 출국을 당한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수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같은 전쟁의 참상을 마주한 스님은 평화운동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공산당으로 몰리며 외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평화에 대한 그의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의 이러한 활동에 감동을 한 이들은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가 평화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귀국 금지 조치를 가하는 등 압박을 했다. 결국 스님은 조국 베트남을 떠나 1973년 프랑스로 망명한다.

망명 후 스님은 1982년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명상‧수행공동체인 ‘플럼 빌리지(Plumvillage)’를 세운다. 세계 각국의 스님들과 평화·참여불교 운동을 이어가며 교류하기 시작한다.

플럼 빌리지는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고통, 아픔을 치유 받고자 스님을 찾았다. 세계인들에게 명상가로 각인되며 불교계의 정신적인 스승이 된다. 그는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이라면 지구촌 어디라도 달려갔다. 그리고 끊임없는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를 다시 나눠줬다.

“우리는 앉고 걷고 먹는다. 그것이 수행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 만일 그대가 평화와 행복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하고 그곳에 가려고 하면 그대는 결코 그곳에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평화롭고 자유로울 때 세상은 이미 극락정토다.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물 위를 걷는 것을 기적이라 한다. 하지만 땅 위를 평화롭게 걷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 틱낫한스님 어록 중에서

스님은 ‘평화를 쫓는 자는 평화와 행복을 만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평화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1990년에는 미국 버몬트주에 승원(僧院) ‘단풍림’, 수행원 ‘그린 마운틴’ 등을 설립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펴며, 아픔과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의 내면을 치유했다. 스님은 불교용어를 일상언어로 녹여내며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8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해 ‘평화를 노래하는 살아있는 부처’ ‘영적 스승’ 등 여러 별칭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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