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23. 계 2, 3장의 이긴자에게 약속된 것들이 있다. 이것은 누구와 싸워 이겨야 받게 되는가? 이긴자와 약속한 것이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이긴 자는 인간들 가운데는 없다. 단지 이기신 자 ‘안’에서 그 이김의 혜택을 입을 뿐이다. 이러한 구원방식은 이미 구약 때부터 실시되어 왔다. 노아는 완전한 자가 아니다. 하지만 완전한 방주가 그와 그에게 속한 자들을 구원해 내었는데 이는 구원의 공로를 구원받은 자의 공로로 되돌리지 않겠다는 언약 원칙을 지상에 앞으로 깔아두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로서 노아는 방주에 동승했던 깨끗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서 번제로 드린다. 이런 조치는 장차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방식으로 구원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진정 이 세대에서 이긴 자는 부활의 첫 열매뿐이다(고전 15:20). 이 첫 열매는 시간상 첫 번째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유일한 승리 사건으로서의 첫 열매이다. 부활의 그 다음 열매는 첫 열매 사건의 언약적 효력에 입각해서 주어지게 된다. 그 혜택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복음으로 죽게 되는 자들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즉 죽게 된 것이 승리이다.

살아야 될 자들이 이긴 자(예수님)와 약속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과제로 살아야 될 자를 일방적으로 살려놓고서는 오로지 ‘예수님 덕분입니다’를 고백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놓고야 마는 일이다. 자신이 지은 상대적인 죄에 대해서 고맙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죄를 접하고서는 하나님의 의가 결코 나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은 창세기 2장에서의 이름을 지어준 주체를 위하여 지음 받은 대상으로서 지배받는 입장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담은 또 하나의 이름을 짓게 된다. 그 이름은 여자이다. 이 여자라는 이름은 남자를 염두에 둔 이름이다. 즉 인간의 대표인 남자를 위한 배필로서 등장한 것이 여자이다. 그래서 여자의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람에게는 분명 지배하는 머리가 있지만 특히 여자에게는 머리가 남자이다. 결코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3, 7)’

이러한 서열은 이름 짓기에서 드러난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짓고 거명함으로써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의 대표자는 남자가 된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한다.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도 여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직접 주어졌다. 이처럼 이름을 지음 받은 쪽은 이름을 준 쪽의 역할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 죽음이 찾아오면서 죽음의 원인규명에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나서게 된다. 즉 죄의 배후에는 누구 있었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되는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골 1:15). 이 예수님은 구약 때부터 ‘주의 이름’으로 행세하시면서 새로운 이름으로 전쟁을 유발하시고 임하셨다. 여기에 대적하는 적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으로 적인 뱀의 후손이다. 이로서 악마는 ‘주의 이름’으로 벌리는 전쟁의 상대자로서만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이 명백하다.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계시록 2, 3장에서 ‘이기는 자’에 대한 보도는 일곱 교회 모두에게 공히 결론으로 제시된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거짓된 가르침과 관계되어 있고, 서머나 교회는 10일간의 환란과 관계된 약속이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과 니골라당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를 말함이고,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선지자라하나 이세벨과 같이 우상숭배 사상을 퍼트리는 자와의 싸움을 말함이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나 죽은 신앙에서 회개하여 일어나는 자를 말함이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과의 싸움을, 끝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 즉 나태해져 버린 신앙에서 자신을 일깨워 이긴 자들을 말함이다.

이처럼 계시록 2, 3장에서 보도된 이긴다는 의미는 어떤 한 가지 대상을 일컬어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각기 일곱 교회들이 처한 현실과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앙적 차원 역시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우리시대도 마찬가지다. 계시록 2장 1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각 교회마다 세우신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가르치며 인도하실 것으로 말씀하셨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에 따라 그 교회가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산간오지 교회와 부요한 도시 교회는 그들이 처한 현실적 배경이 크게 다르다. 또 성도들 개인의 환경이나 신앙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싸워야 하는 실제적 싸움은 동일할 수 없다. 사데 교회 안에 이미 이긴 자가 있고 아직은 이기지 못한 자가 있다는 말씀에서도 이러한 의미가 확인된다.

그러나 올바른 진리 안에 머물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싸움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또 스스로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고백한 것(고전 9:27)과 같이 아시아 일곱 교회들도 대상은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는 모두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용기, 희생의 감내, 끈질긴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긴 자와 약속한 것이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질문이 잘못되었다. 계시록 2, 3장에서 언급된 이기는 문제는 구원과 관계한 것이 아니다. 모두 영광의 상급과 관련된 교훈이기 때문이다. 또 ‘이긴 자와 약속한 것이 없어도’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성경을 억지 해석한 것에서 발생한 잘못된 질문이다.

계 2, 3장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 속한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을 향한 말씀인데, 그들과의 어떤 약속이 구원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구원이란 오직 은혜, 곧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롬 3:27; 4:13), 그 믿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엡 2:8, 9).

[SOSTV 생애의 빛]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 왜냐하면 계시록 2, 3장의 이긴 자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계시록 2, 3장의 이긴 자는 누구일까? 성경 예언을 대언하는 어느 한 개인, 대언의 사자를 가리키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먼저 계시록 2, 3장의 이긴 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2,3장의 일곱교회 예언을 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예언은 주님의 부활 시부터 곧 임할 재림 시까지 기독교 역사 2000년을 일곱 시대로 나누어 미리 보여준 지혜의 계시다. 계시록 2, 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들의 이름의 의미와 영적 형편이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이어진 일곱 시대 교회들의 영적 형편과 꼭 들어맞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흠모할 만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베소 교회’는 순결했던 초대교회(34~100)를, ‘몰약’이라는 의미를 지닌 서머나 교회는 순교의 피가 몰약처럼 흩뿌려진 순교시대의 교회(100~313)를, ‘성채, 요새’라는 의미를 지닌 ‘버가모 교회’는 타협의 물결로 견고했던 복음의 성채가 무너진 타협시대의 교회(313~538)를, ‘통탄스러운 희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두아디라 교회’는 교황권의 핍박이 극심하였던 중세암흑시대의 교회(538~16C초)를,

‘남아있는 것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사데 교회’는 중세암흑시대에 진리를 위해 남아있던 개혁가들이 로마교황권에 대항해 일어섰던 종교개혁시대의 교회(16C초~18C말)를, ‘형제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닌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류애의 사랑이 충만했던 기독교 복음 선교 시대의 교회(18C말~19C중)를, ‘백성을 심판하심’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오디게아 교회는 교파와 교권을 만들어 정통이라 자처하며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죽어가고 있는 현 교회 즉 마지막 심판시대의 교회를 가리키고 있다.

자 그렇다면 계시록 2, 3장의 이긴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위에 기술된 각 일곱 교회 시대 속에서 진리와 말씀으로 승리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초대교회 시대)의 이긴 자는 복음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처음 행위를 지켜서(계 2:5) 이긴 자들을, 서머나 교회(핍박시대의 교회)의 이긴 자는 마귀의 핍박의 시련을 인내하여(계 2:10) 이긴 자들을, 버가모 교회(타협시대의 교회)의 이긴 자는 발람의 교훈(계 2:14) 즉 이방 종교와의 타협과 섞이지 않고 진리를 고수함으로 이긴 자들을,

두아디라 교회(종교암흑시대의 교회)의 이긴 자는 이세벨의 행음(계 2:20) 즉 교회를 어둡게 만드는 영적 간음의 강요에 굴복치 않고 이긴 자들을, 사데 교회(종교개혁시대의 교회)의 이긴 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남아있는 몇 명(계 3:4)이 종교개혁을 일으키어 이긴 자들을, 빌라델비아 교회(복음선교시대의 교회)의 이긴 자는 복음의 활짝 열린 문을 통하여 말씀을 가지고(계 3:8) 세계선교를 이룬 이긴 자들을, 라오디게아 교회(심판시대의 교회)의 이긴 자는 바로 눈멀고 벌거벗은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서 진리를 깨닫고 뛰쳐나오는 즉 문 밖에서 두드리시며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계 3:20) 바벨론에서 뛰쳐나와 이긴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면 모든 것들을 이겨 낸 자이다. 그리고 언약을 성취 받았으며 받은 언약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이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하는 자인 것을 알았다.

7절에서 ‘성령님께서 교회들에게 말씀 하시는 것을 들으라’고 하신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것에서 주워 먹게 하리라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만 지칭해서 말한 것은 아니며 나머지 여섯 교회들에게도 이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긴 자들이며 생명나무의 것들을 먹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들을 이겨 냈으니, 너희 안에 계신 그 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기 때문이라(요일 4:4, kjv)’ 여기에서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명나무의 것을 먹을 수 있는 자들은 행위나 계명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행위가 아니며 믿음으로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다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얻은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아직도 세례가 구원이라고 말하는 자나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자들, 그리고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는 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아직도 기회가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만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구원의 길도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 한다. 거짓 사도들의 유혹을 이겨낸 자 만이 생명의 나무에서 나는 것들을 주워 먹을 것이다.

인간의 철학이나 경험 사상에서 생명을 얻으려는 자는 하나님과 관계도 없으며 구원도 영생도 없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서머나 교회는 몰약으로 상징된다. 중세에 복음을 얻는 자들은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며 고문과 참수를 당한다. 당대의 교부들은 교세를 확장 하려고 세상의 학문과 경쟁하려고 논능법을 만들었다. 콘스탄틴은 교회와 국가를 국혼시켰다. 베드로가 교회가 반석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타 종교와 힘을 겨룰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섬기며 자칭 교회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하지만 어렵다. 쓴 잔을 마시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거대한 집단을 이겨낼 수 가 없다.

그러므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고배를 마셨다. 예수님 또한 유대교와 로마를 인간의 육신으로 구원 할 수 없어 십자가의 사건으로 그들을 이겼으며, 이러한 사실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 하였다. ‘그보다 더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그에게 와서 그를 이길 때에는, 그가 신뢰하였던 그의 모든 무기를 그로부터 빼앗고 그의 약탈물들을 나누느니라(눅 11:22)’ 육신을 의지하고 육으로부터 난 자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신뢰 하므로 자신의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을 이기셨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7:33)’ 세상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며,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로다(롬 3:4)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하였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을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하나님의 피로 세상을 이긴 믿음을 통하여 사탄(거짓선지자)을 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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