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남태(브랜드 전문가)

아,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이 얹혀 간다. 출퇴근 때에 만나는 색 고운 단풍나무와 앙증맞은 노란 은행잎을 보노라면 가는 세월의 아쉬움보다는 이런 가을을 누릴 수 있다는 데에 더 감사하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은 견딜 만큼만 쌀쌀하여 오히려 청량하다. 더욱이 반달이 밤하늘에 걸리고 별 총총히 은하수를 뿌려대기 시작하는 귀갓길이면 술 한 잔이 절로 그리워지는 법. 여기에 옛사랑의 그림자라도 삐죽이면 마음은 벌써 불콰해진 돛단배처럼 일렁인다.

연분홍빛 벚꽃 터널이 몽환적이라면 줄지어져 흩날리는 은행나무 가로 숲은 깊은 사색의 감흥을 게워낸다. 그리하여 조금은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뭔가 채움을 기대하는 심리가 발동한다.

친구에게 이런 현상을 나지막이 들려주니 “너 가을 타는 모양이다”라고 핀잔을 준다. ‘가을을 탄다’고 참 오묘하면서도 아름다운 말이다.

여리고 아린, 숭숭하고 털털한 마음결을 읊은 시구가 아닐 수 없다.

가을은 왠지 참한 규수의 인품마냥 들뜨지 않아 좋다. 물먹은 티슈처럼 차분하다. 그러면서도 산만하지 않은 색채의 수채화를 볼 때처럼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건 또 무엇 때문일까.

햇살이 적당한 오후 한때를 골라 산책을 나선다. 등산로를 이어주는 집 근처 공원은 혼자 걷기에 제격인 장소다. 계곡 천을 따라 라이브카페도 몇 군데 있어 흘러간 가요를 들어가며 걷기를 즐긴다. 그런데 오늘 따라 유난히 심란하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인류의 진보 가치가 묻혀지듯 잔뜩 무거운 감성이 돋는다. 황망하게 까칠어진 주위 풍경과 간간이 발등에 떨어지는 낙엽이 지난 기억의 갈피를 꺼내 들며 수작을 부리기 때문이다.

첫사랑.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큰북처럼 오감을 요동치게 하고 세포가 감겨들 듯 작은 북을 가슴에 안은 것 같은 포만감. 모든 시름을 잊게 하는 경쾌한 심벌즈의 음처럼 삶의 활력을 안겨주던 보물 창고가 아닌가.

내가 막 사랑을 시작할 쯤에는 칼 힐티의 ‘잘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이 소중한 등불이 됐다. 1년 365일로 단락을 이룬 철학 명상집인데, 좋아하던 사람과의 만남을 앞둔 전날 밤이면 책의 제목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당연히 괴로운 불면증은 아니었다. ‘내적 환희에서 일어나는 인생 최대의 희열을 간직한 불면’이었으니.

사각거리듯 옷 벗는 가을의 숲에선 경건함이 감돈다. 가을을 타는 것은 혹 그런 것이 아닐까. 전 생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 같은 하늘 어느 언저리에 살고 있을 옛 연인.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순간들마다 잃은 용기로 가슴 아파했던 사연. 희열이 절망이 됐던 생채기.

그런 것들을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 않겠냐는 각성과 메마른 정서에 물기를 뿜어주는 생체 작동은 아닌지. 아니 너무 숙연한 분위기니 주책 좀 부려보라는 치기라도 괜찮다.

알 수 없는 근심으로 밤을 지새우기에 딱 좋은 계절. 산책하듯 변하고 다시 먼 길을 돌아 제 자리에 찾아드는, 세상의 이치를 일깨우는 가을의 끝자락은 얼마나 고맙고 신성한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는 깊고 깊은 가을밤. 알싸하고 맑은 공기 한없이 선물하는 이 밤에 상념 없이 까르르 웃고 떠드는 너 보다는, 그래도 만념에 휩싸여 마음 휑하다 투덜대는 내가 더 낫지 싶다고. 너도 빨리 가을을 타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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