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 성성 50주년을 맞은 윤공희(88) 빅토리노 대주교가 지난 17일 오후 광주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앞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윤공희 대주교, 서품 50주년 맞아 기자회견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5.18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민족적 큰 시련이자 아픈 역사이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다지는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천주교 주교성성 50주년을 맞는 윤공희(88) 대주교가 지난 17일 오후 광주시 서구 쌍촌동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윤공희 대주교는 구순을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에도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윤 대주교는 “하느님이 오래 살게 해주시고, 주교가 된 것도 하느님이 부르신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주교성성 50주년을 맞게 된 소감을 말했다.

1924년 평남 진남포 용정리에서 태어난 윤 대주교는 평남 진남포 출생의 윤공희 대주교는 1963년 10월 20일 주교 수품을 받은 뒤 73년 11월 30일 제7대 광주대교구장으로 착좌했다. 함남 덕원신학교를 수료하고 1950년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월남한 뒤 같은 해 3월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사제가 된 그는 6.25 전쟁 때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종군 신부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윤 대주교는 “신부가 된 후 시작됐고 평양이 수복됐을 때 내려왔다. UN의 보좌 신부로 고용돼 포로수용에서 포로들과 함께했다”며 “당시 포로들을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신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가르치고 미사를 드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수용소의 중환자 텐트를 찾아 복음을 전했는데 믿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은 포로들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면선 “죽음을 앞둔 중환자가 교리를 듣고 싶다고 해서 들려줬는데 다음날 다시 찾아 가보면 숨져 있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윤 대주교는 명동성당 보좌신부, 성신중·고 교사를 거쳐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교품을 받은 1963년 그는 수원교구장이 됐다. 이후 1973년 11월 30일 제7대 광주대교구장으로 착좌해 27년간 교구를 위해 헌신했다.

그의 인생에서 1980년 5월은 특별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그 현장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는 “5.18때 부끄러운 일이 두 가지 있었다. 금남로에서 상처받은 사람을 만났는데 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며 “이웃을 도운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피해 버린 사람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남동성당에서 시국미사를 하려고 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미사를 앞두고 군인들이 성당을 포위했다. ‘또 사람들이 잡혀가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겁이 나서 미사 직전에 포기를 했다”고 말했다. 윤 대주교는 “한 신부가 찾아와 ‘꼬리 내린 것처럼 됐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아직도 5·18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교훈과 희생의 가치가 있는 사건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며 “광주의 큰 시련과 고생을 바탕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신장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완성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민주사회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용서를 한다고 해서 정의에 대해 요구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움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오는 22일 오전 10시 광주 북구 임동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의 주교수품 50주년 감사미사와 축하식·축하연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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