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임문식 기자] 몽골제국의 건국자인 칭기스칸은 다른 정복자와 달리 생전에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후에 멋대로 상상화를 남겼다. 중국인은 마음이 넉넉한 늙은 아저씨로, 페르시아인은 투르크의 술탄처럼, 유럽인은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했다. 그만큼 그에 대한 오해가 많다는 의미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그는 동족으로부터 소외돼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의 공포와 동족에 대한 불신은 세계를 삼키려는 강력한 욕망의 원동력이었다. 해마다 강적을 물리치며 몽골초원을 장악한 그는 다른 정복자들이 전장에서 물러나는 쉰의 나이에 유목민족을 괴롭히던 문명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의 혁신적인 전투기술로 중세 유럽의 중무장 기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기병대가 전면에 나섰다. 탁월한 기습과 공성전술로 웅장한 성곽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정복은 수 천 킬로미터로 확장되면서 다수의 전선이 형성됐지만, 10만 명의 몽골군은 25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넓은 지역과 많은 사람들을 정복했다. 태평양과 지중해가 연결되었고, 시베리아에서 베트남까지 통합됐다. 몽골제국은 여러 문명을 융합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었다. 동양과 유럽이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자신은 법을 초월한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칭기스칸은 통치자도 목동과 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모든 신민들에게 정치적 충성을 요구했지만, 완전한 종교적 자유도 허용했다. 인질을 요구하는 관행을 없애고 모든 대사와 사절에게 외교적 면책특권을 부여했다. 양민을 습격하는 도적이나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투르크족을 무너뜨리는 몽골군이 신의 채찍이라고 환호했지만, 결국 로마교황의 부패와 무능을 확인하고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겼다. 단단한 기틀을 다진 그가 죽은 후에도 제국은 150년 동안 더 팽창했다.

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그의 후손은 러시아, 터키, 인도, 중국의 북부, 페르시아에서 700년 동안 크고 작은 나라를 다스렸다.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가리키는 인도의 무굴왕조는 1857년에 영국인에게 망했다. 칭기스칸의 마지막 후예는 우즈베키스탄의 권좌에 있다가 1920년 소비에트 혁명의 물결에 밀려 퇴위한 부하라의 아미르 알림칸이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