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이명박 정권이 야심작으로 추진한 하천개발사업이 국정감사의 도마에 올랐다. 부실공사와 자연훼손이라는 두 가지 잣대가 기준이다. 과정에서의 잘못은 가려지겠지만, 자연개발은 인간의 오만이라는 관념과 생존조건 개선이라는 필요성 사이에서 쉽게 결론을 얻기는 어렵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하천개발은 농업의 근본자원인 물을 관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사업이었다. ‘노을이 물결에 비치면, 물빛이 마음에 깃든다(霞光映碧波, 水色入人心)’는 항주의 서호는 저절로 형성되지 않았다. 당(唐)의 백거이(白居易)와 송(宋)의 소동파(蘇東波)가 2백여 년이라는 시간을 준설공사를 한 것도 중요했지만, 이후에도 아름다운 서호를 가꾸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명(明) 양맹영(楊孟瑛)도 한 사람이다. 명의 전여성(田汝成)은 <서호유람지여(西湖游覽志餘)>에서 백낙천(白樂天), 소자첨(蘇子瞻), 양온보(楊溫甫)의 치적을 으뜸으로 꼽았다. 당송시대의 정비사업으로 서호는 일시적인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원대의 약 백 년 동안 다시 황폐해졌다. 토호들의 사유화가 원인이었다. 곳곳에 마름을 경작하는 능전(蔆田)과 연을 심은 하탕(荷蕩)이 늘었다. 소제(蘇堤)의 서쪽은 봉초로 뒤덮였다. 호숫가에 저택도 늘어섰다. 그러자 물의 흐름이 막혀 오염이 심했다. 이러한 현상은 명초까지 계속되었다.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 온 서호의 물안개도 사라졌다.

명대에 항주의 번영이 회복되자 호수주변을 정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도어사 류부(劉敷), 어사 오문원(吳文元)이 나섰지만, 기득권을 지닌 세력가들의 반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어사 사병중(謝秉中)과 포정사 류장(劉璋)이 호수의 농지를 정리하고, 어사 오일관(吳一貫)이 수문을 개축했다. 1503년에 항주군수로 부임한 양맹영(楊孟瑛)은 서호를 정비하여 당송시대의 옛 모습을 되찾겠다고 결심했다. 실상을 파악한 그는 그대로 두면 서호가 매몰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실은 백거이나 소동파에 비해 더 복잡했다. 당의 통치자는 지방관의 자율권을 보장했고, 송의 소동파는 자세한 기획서를 올렸지만 나중에 예산전용과 자기가 놀고 즐기려고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양맹영은 더욱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가장 복잡했던 것은 결재체제였다. 대명률에 따라 먼저 지방순시관에게 인가를 받은 후, 간신히 조정에 주청할 수 있었다. 공부의 심의가 떨어져야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다. 백거이와 소동파는 분묘나 경작지를 훼손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지방 사람들의 반대를 크게 받지 않았지만, 양맹영은 이권이 걸린 토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사업은 5년이 지나서야 겨우 시작되었다. 서호의 훼손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업기반과 무관하지 않았다. 1507년 2월, 공사시작에 앞서 양맹영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선현들은 백성에게 유리한 것을 근본을 삼았다. 서호의 침식방지와 농업용수 확보는 필수적이다. 오랫동안 서호는 침식되어왔다. 이 고장 출신으로 서호의 사정에 밝은 시랑 하공(何公)은 숙원사업인 서호의 준설공사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사정은 이곳에서 살아온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 공사의 성공은 여러분께 달렸다. 물과 흙을 관리자인 내가 왜 꺼리겠는가? 소수의 부호들이 대부분 잠식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나로서는 이들의 불만이 고민이다. 백성의 생업은 관에서 관리했다. 무단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유화된 것을 회수하는 것은 수탈이 아니다. 농지에 물을 대려면 서호에 많은 물이 저장되어야 한다. 서호가 막히면 농지가 황폐하게 된다. 수 십 가구의 이득을 위해 서호의 훼손을 눈감아 주면 피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나는 세력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 내가 두려운 것은 귀신뿐이다.”

경작지를 잃은 일반 농가를 위해서는 공유지와 폐사찰이 보유한 비옥한 땅을 분배했다. 대규모의 사업이 완공되자 서호는 옛 모습을 찾았다. 명승고적도 복구되었다. 호수를 메웠던 진흙으로 소제(蘇堤)를 높이고 양쪽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소제는 육교연류(六橋烟柳)라는 절경을 찾았다. 소제와 평행선을 이루는 양공제(楊公堤)도 쌓았다. 그러나 이러한 치적에도 불구하고 양맹영은 비용에 비해 효과가 미약하다는 탄핵을 받고 강등되었다. 백성들의 눈은 정확했다. 그들은 양맹영을 백거이, 소동파와 나란히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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