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 아파트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운 채 차 안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그런 아베크족을 자주 본다. 데이트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기에도 좋겠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의 일이다. 집까지 바래다 준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일일 것이다. 남자친구와 차 안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 젊은 아가씨가 있다. 벌써 몇 년째. 두 사람의 차속 데이트. 삼십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다. 금세 가을밤이 깊어진다.

이들은 사계절 내내 차 시동을 끄지 않고 데이트를 즐긴다. 겨울에는 춥다는 핑계로 히터를 켠다. 여름에는 더워서 에어컨을 가동한다. 문제는 차량 공회전이다. 주차장 옆은 어린이 놀이터. 아이를 데리고 놀러 나온 엄마 아빠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데도 매연 문제는 이들의 안중에 없다. 단속 때 과태료 5만 원이 부과됨을 알기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침 출근길에 운전기사가 차량 시동을 오래 걸어놓고 차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을 본다. 경찰 순찰차도 초등학교 담벼락에 세워놓고 차를 공회전 시킨다. 일반적으로 공회전 제한시간은 휘발유·가스 자동차는 3분, 경유 자동차는 5분이다. 기온이 5℃ 미만이거나, 25℃ 이상일 때는 냉·난방을 위해 10분까지 공회전이 허용된다. 꼭 단속 때문이 아니다. 주위에 대한 배려가 없다. 쾌적해야 할 생활공간을 고통스러운 ‘환경 사각지대’로 만들면서도 자신들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주의, 이제 좀 내버리면 안 될까.

지난 일요일 모처럼 백화점을 들렀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매캐한 매연에 고통스러웠다. 이산화황과 일산화탄소, 미세먼지 등이 뒤섞여 뿜어내는 묘한 냄새가 역겹기 짝이 없었다. 필자는 90년대 미국에 출장을 가보기 전에는 세상이 다 그런 줄 알았다. 미국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도시마다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필자가 가 본 대형백화점이나 마트, 아파트 지하 주차장 공기는 별로 탁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때 자동차 배출 매연저감장치 부착문제를 놓고 환경부가 고심하던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환경단체에서는 차량 구입비가 오르더라도 매연을 줄이는 장치 부착을 필수화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업계에서는 비용 상승 등을 이유로 완강히 반대했다. 결국 환경부는 자동차 업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때 결론이 정반대로 났다면 공기오염을 줄일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들이마시는 공기가 지금보다는 훨씬 맑을 것 같아 아쉽다.

# 부산 해운대에 사는 80대 할머니 L씨. 그는 요즘 이래저래 힘들다. 복지사각지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케이스이다. L 할머니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병명은 고혈압, 파킨슨씨병, 뇌졸중, 척추협착증, 좌골신경통… 앉았다 일어서면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척추가 뭉개진 지 오래이고 여러 차례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수술 전보다 걸음걸이가 더 힘들다. 한 삼십미터만 걸으면 허리가 무너질 것 같다. 한참 쪼그리고 앉아 쉬었다 겨우 일어나 다시 걷는다. 집안에서도 한번 앉았다 하면 다시 일어나는 일이 힘들어 주로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다.

건강보험공단 실사 결과 3급. 자식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그는 이른바 동사무소 노인돌봄 서비스를 2년여 받았다. 거동이 불편해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어려워 고통을 겪던 차에 동사무소에서 보내주는 ‘바우처’ 아줌마는 반가웠다. 도우미가 집까지 방문해 집안청소도 해주고 장도 봐주고 밥도 해주니 지내기가 좀 나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올 여름 동사무소의 노인돌봄서비스가 돌연 종료됐고 재가 노인 요양 서비스 기관에서 새로 사람이 온 것.

“요양 보호사는 가사 도우미가 아니다.” “거실은 청소해줄 수 있지만 베란다는 안 된다.” “간장 담그는 것은 도와줄 수 없다.” “이틀 근무했지만 한 달 근무한 것으로 사인해 달라.”

장기요양보험 지정기관의 말은 마치 외계인의 언어 같았다. 건강보험공단에 전화해 알아보니 까다로웠다. 할머니가 내는 재산세와 건강보험료 액수가 커져 동사무소의 노인돌봄서비스 제도는 수혜범위에서 제외됐다는 얘기였다. 남편이 떠난 98년 이후 아파트가 자신의 명의였다. 여기에 아들이 L씨 명의로 5년째 자영업을 하고 있다. 아들도 근근히 사는데 올해 건강보험료가 17만여 원으로 갑자기 뛰어올랐다. 이로써 동사무소 노인돌봄서비스 혜택 기준 6만여 원을 넘게 돼 불가능하다는 것. 보험료는 아들이 대신 내지만 특별한 소득도 없다. 도우미도 없이 혼자 지내니 외롭고 서럽기만 하다. 여유가 있으면 파출부라도 부를 텐데….

삶의 사각지대는 생각보다 많다. 환경 복지 정치 행정 가정 교육 여성 군복무… 우리는 사각지대를 숙명처럼 안고 산다. 어렵고 낯설기만 한, 힘 있는 자 편에 서 있는 규정과 일방적인 법집행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런 사회에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우리는 국력이 욱일승천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인가, 어두운 사각지대의 자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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