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를 폐지하겠다고 나서자 비판적인 여론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 네티즌은 ‘세종대왕이 경을 칠 노릇’이라며 기회주의식 대학행정을 비난했다. 언어엔 그 나라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배워왔건만 ‘이상적인 가르침’이었나 보다. 세계에선 아름다운 한글이라고 극찬을 받지만 정작 본국에선 알파벳이 우위선점해 있는 이 서글픈 현실을 누가 과연 알아줄까. 그리하여 글마루에서 한글을 알아가는 코너를 마련했다.

# 지난 6월 15일 KBS1TV <특파원 현장보고>에서 ‘일본이 섬기는 신의 문자 한글’이 방영됐다. 내용인즉슨 일본 고대 신이 쓰던 문자가 한글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현지 주민들은 “신의 문자와 대한민국의 한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르다”며 신의 문자가 한글일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했다.

# 환단고기엔 가림토 문자가 있다. 그 생김새가 한글과 꼭 닮았다. 사학계와 언어학계에선 가림토에서 한글이 비롯됐다는 정설을 부정하고 있지만, 생김새를 봐선 틀에 찍어낸 붕어빵처럼 닮았다.

#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한글)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古篆)을 본받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눠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이 이어(俚語;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고 이름 하겠다.

<세종실록> 제102권,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 30일자

‘큰 글’이라는 의미를 지닌 한글. 이름대로 한글은 요즘 전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한류열풍이 지속되면서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세계인이 점차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자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외국에서 알아주니 이제야 슬그머니 한글 디자인의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영어가 대세다. 이러한 슬픈 현실을 그냥 한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그래서 가장 먼저 한글의 태생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어낸 한글. 하지만 <세종실록>엔 고전을 본받았다고 친히 기록돼 있다. 고전이라 함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세종대왕, 한글을 친히 지었을까?

앞서 말한 <세종실록>엔 왕이 친히 한글 28자를 지었다는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는 글귀가 있다. 한편 <훈민정음(국보 제70호)>엔 왕이 새롭게 지었다고 하여 ‘新制’라고 기록했다. 이를 두고 <세종실록>에 기록된 親制를 ‘친히 만들었다’라는 것보다 ‘새로운 제도’로 해석돼야 한다는 게 의미상으로 옳다는 의견이 있다.

성균관 석전교육원 최명재 전임교수는 “신제(新製)는 새로 제작하거나 제조하는 것이요, 신제(新制)는 새 제도 또는 새로운 체제를 의미한다”며 “<세종실록>에서 말하는 친제(親制)에서 친은 새롭다라는 뜻이 있어, 여기서도 새로운 제도로 해석해야 옳을 것 같다. 만약 ‘임금이 친히 지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려면 ‘上親制’가 아닌 ‘上親製’가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결론적으로 ‘上親制諺文二十八字’의 의미는 ‘임금께서 친히 한글 28자를 제도화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고 본다”면서 그 이유로 “그 뒤에 한글 28자는 ‘고전을 본받았다(其字倣古篆)’라고 기록됐으니 ‘임금이 새로 지었다’라고 해석하면 모순에 직면한다”고 말했다.이러한 이유로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물이 아니라는 것이 최 교수의 논리다. 그리고 한글의 본은 바로 가림토라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림토 문자(38자)와 한글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에선 “이름은 훈민정음이라 하고 글자 모양은 고전을 본받았다(名曰 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라고 한 것을 찾아볼 수 있으며,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2월 20일자에는 “아마도 언문(한글)은 모두 본래 옛 글자이지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즉 글자 모양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본받았으나 음(音)을 이용해 합자하는 것(절운; 切韻)은 모두 옛 것과 어긋난다”란 기록이 있다. 실제 가림토 38자 가운데 23자가 훈민정음과 일치한다. 나머지 다섯 글자(ㅇ, ㅂ, ㄱ, ㅌ, ㅎ)는 가림토 38자에 없는 글자로 새로 만들어진 글자다.
 

최명재 교수가 말하는 가림토 문자와 훈민정음
<훈민정음>에서 ‘글자 모양은 고전을 본받았다’라고 분명히 밝혔으며 그 글자 모양이 가림토정음 38자 중 훈민정음 23자가 똑같은 점으로 미뤄 볼 때 여기에서 고전이라 한 것은 가림토정음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훈민정음 28자 중에서 新製(신제; 새로 만든 글자)한 글자 수는 다섯 글자로 ‘ㅇ, ㅂ, ㄱ, ㅌ, ㅎ’이지요. 이 다섯 글자는 가림토 38자 중에 없었던 글자를 새로 만든 것이므로 창제(創製)라고 할 수 있네요. 그러나 가림토정음의 글자 모양을 본받았으니 ‘훈민정음은 창제가 아니다’라고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고 가림토 정음의 글자 모양만이 전해졌다면 이는 그저 하나의 문자 기호로 취급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훈민정음> 책자의 ‘제자해(制字解)’에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제자해(制字解)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坤復之間爲太極 …(중략)… 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今正音之作 初非智營而力索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하늘과 땅의 이치는 음양오행일 뿐이다. 곤괘와 복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중략)… 그러므로 사람의 성음(聲音)도 모두 음양의 이치가 있건마는 돌아 보건대 사람들이 살피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정음(正音)을 만든 것도 처음부터 지혜로 경영하고 힘써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말소리에 의거해 그 이치를 다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초성과 중성으로 분류한 후 다시 초성은 오행(木·火·土·金·水)의 원리에 입각해 오음(어금니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잇소리, 목구멍소리)으로 분류해 발성기관을 상형했고, 중성은 천·지·인(天·地·人)과 삼재를 근간으로 결합해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이를 위한 쉬운 글

“ 나라 말소리와 문자가 서로 유통되지 않아서 이러한 까닭으로 (문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자기의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내가(세종) 이를 가엾게 생각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쉽게 익히도록 하여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서문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한 글이다. 훈민정음이 한글로 간편하게 불린 시기는 1910년대 초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명칭이 한글이다.

훈민정음은 보통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최명재 교수는 “訓(훈)의 뜻에는 ‘본디’라는 의미가 있다. 평상시에 쓰는 본디 말의 말소리대로 표기할 수 있는 표준음(正音)을 이용해 글자를 만들었으므로 이 글자를 언문(한글)이라고 했다”며 “‘훈민정음의 의미는 본디 말의 말소리로 지은 백성의 표준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한글은 말소리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표음문자(表音文字)라는 것이다. 이러한 한글은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자다. 초성과 중성, 종성의 만남의 원리를 이해하면 금방 한글을 응용해 글자를 만들어낸다. 실질적으로 외국인에게 1시간 내외로 원리를 알려주면 곧 글자를 만들어내고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 한글의 위력이다.

이 같은 이유로 한글은 ‘대체 문자’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바우바우 섬에 거주하는 찌아찌아족은 부족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한글을 택했다. 말을 옮겨 쓸 수 있는 문자로 한글이 적격이었다. 그래서 바우바우시는 찌아찌아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누군가는 한글을 ‘평화의 문자’라고 말한다. 창제 원리부터, 그 뜻이 홍익인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한 글, 더 나아가 세계 문화를 보존하는 도구가 된 한글이다. 그래서 한글은 소중하다.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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