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정부조직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중앙행정기관은 17부 3처 16청과 4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공직자들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공무를 수행한다.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조직이 융합적인 관계를 맺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 굴러가야 하지만 때로는 부처이기주의로 인해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청와대나 국무총리실이 나서서 노력을 기울여왔다. 결과적으로 국정운영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으로 돌려야 하지만 임기 말 또는 임기 초 같은 변혁기에는 부처가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전개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가 보건데 변혁기에도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초지일관 중앙행정기관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아마 법제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법제처는 차관급 청장을 수장으로 하는 소수 정예의 작은 조직이지만 업무 영역이 분명하여 내적으로 탄탄하며 강한 조직이다. 왜냐하면 행정부의 각종 법령사항에 대한 입법활동 등 제도화를 선도하는 기관으로서 타 기관에서는 조직 정비 등으로 몸살을 앓고 눈치를 살펴야 하는 기간에도 정부 법령 관리 등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법제처는 당당함이 돋보이는 일등 부처였다.

법제처가 하는 일은 정부입법을 제·개정하여 국회에 송부하거나, 국회로부터 넘어온 법률 등을 공포하고 대통령령 등 하위법령을 만들거나 각종 법령을 관리하면서 법률유보(法律留保)를 통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국민의 편안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일이다. 그러한 막중한 역할을 함에도 법제처는 정부의 직제 순서나 부처대접받기에서는 항상 뒷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직원들 사이에서는 불평이 터져 나올 만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조직원들은 해박한 법제 지식으로 정부부처의 각종 법제를 심의하여 제도로서 손색없도록 만든 공로가 매우 큰데, 그에 걸맞는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가장 성실한 법제인으로 칭송받았던 김용진 전 차장이나, 친화력이 남달랐던 윤장근 전 차장, 법제업무에 사통오달한 정태룡 아주대 교수 등이 담당과장과 법제관, 국장 등으로 재직할 당시 그들의 업무 지식에 관한 해박함과 집념에 탄복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법제처 인사들의 면면을 겪고 지켜보면서 정부기관 가운데 법제처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 느꼈는바, 이 생각은 이제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러한 법제처에서 며칠 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2013. 5. 8. 국가정보원이 작성하여 보관 중인 2007년 남북정상 간 대화록에 대하여 법제처에 정부유권해석이 요청된 바 있으나, 정치적 현안이라는 이유로 사건을 보류한 것’이라는 내용에 관해 법제처가 9월 30일 해명 보도 자료를 냈다.

내용인즉 “해당 유권해석과 관련하여 일부 위원이 정치적인 현안이라는 이유로 보류하는 의견이 있었으나, 이는 주된 보류사유가 아니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해당 안건을 보류한 것이었고, 추후 ‘법제업무운영규정’ 제26조 제8항 제4호, 제7호에 따라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사유로 반려하였다”는 것인데, 이 내용이 사실관계에서 궁금증을 더한다.

법제처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정부유권해석’을 내리는 일이다. 정부 각급 행정기관이 법령을 집행하기 위한 전제로 법령해석에 의문이 있거나, 관련된 법령에 대한 해석이 서로 엇갈리는 경우에는 정부견해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정부 전체 차원에서 법제처가 법령해석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민사‧상사‧형사, 행정소송, 국가배상관계법령 및 법무부 소관 법령과 다른 법령의 벌칙조항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유권해석을 맡고 있다.

한겨레신문 기사에 대한 법제처 해명보도를 보고서 필자는 그간에 보냈던 신뢰가 순식간에 무너짐을 느꼈다. 법제처는 법령해석 요청이 접수될 때마다 법령해석심의위원회를 열고 그 결과를 법제처 홈페이지 보도란에 올리는데, 공교롭게도 5. 21.자 국정원이 요청한 문건과 관련된 제18회 회의 결과는 게재하지 않았다. 그 내용이 법제처가 9. 30.자로 올린 해명 내용과 같다면 당연히 심의결과를 제때 올려서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줄만 했다. 그러함에도 법제처는 보도 자료에서 18회 위원회 개최 결과를 건너뛴 것은 꼼수요, 의도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법제업무운영규정’을 살펴보아도 국정원이 해석을 요청한 ‘2007년 남북정상 간 대화록이 대통령기록물 여부’에 대해 법제처가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사유로 반려하였다”는 것은 주객전도의 호도로 면피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국정원이 법무부 소관이 아닌 법제처 소관으로 유권해석을 의뢰한 것임에도 법제처의 답변과 해명은 진실을 가리는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당당하던 법제처의 전통이 무너지는 순간을 보는 느낌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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