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한국 세계평화작가와 설치미술가 강익중 작가의 만남 (2008 한한국 뉴욕 평화특별전)

“아가야, 이제부터 한국이는 네가 잘 간수해 주어야겠다.”

한한국이 장가를 들었을 때 시어머니는 부처님도 그런 표정을 짓기 어려울 만큼 인자한 얼굴로 윤 시인에게 당부했다.

“네. 어머님도 28년간 저이를 지키느라 힘드셨죠? 걱정 마세요, 이제부턴 제가 임진왜란 때 논개처럼 충성을 다해 모실게요.”

아내가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남편의 이름이 ‘한국’임을 빗대어 웃으며 화답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한국의 어머니와 아내는 서로를 보듬어 가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은 한한국 본인인 셈이었다.

“난 참 나쁜 놈인가 봐요.”

“또 무슨 소리가 하고 싶으세요?”

한한국이 복에 겨워 아내에게 팔자 좋은 투정을 했다.

“그렇지 않아요? 다른 친구들은 어머니냐 마누라냐를 놓고 장난 아니게 고민한다는데, 나는 지금껏 두 여자의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해 오면서도 고마워할 줄을 몰랐으니.”

“당신도 참 실없기는.”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아들 집에 놀러 오신 시어머니께 윤 시인이 간곡히 말했다.

“어머니, 영두도 다 컸어요. 이젠 저희와 함께 사세요!”

손자인 영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끔찍이 사랑하셨으면서도, 아들네에서 사는 것만큼은 끝까지 거절하셨다.

“난 시골이 좋지라! 화순 땅 어리를 못 떠나지라잉.”

그러던 어머니가 마침내 한한국의 집으로 살러 오셨다. 아니, 그들 부부에게 행복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식물인간이 되셔서야 몸을 의탁해 주셨다.

“뭐라고요?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고요? 네, 알았습니다…….”

광주 남광병원의 담당의사로부터 어머니가 의식불명의 상태로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한국 부부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70줄을 넘어서자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부부가 달려가 보니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주무시듯이 누워계셨다.

“어머니! 한국이 왔습니다. 눈 좀 떠보세요.”

“어머님! 영두 엄마예요.”

어머니는 깊은 잠에 드신 듯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막내아들 내외에게 이렇게 꾸중하셨을 것이다.

“야들아, 바쁜디 뭐 하러 왔어라잉?”

그런데 어머니는 지금, 꾸중 대신 산소통의 힘을 빌려 힘겹게 숨을 내쉬실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한한국의 가족들이 모였다.

“틀렸어라! 엄니 힘 더 안 들게 집으로 모시자잉.”

“난 장례 치르러 오라구 혀서 그런 줄 알았어라.”

“후유! 모시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지…….”

“한국아, 그려두 니가 형편이 젤 낫지라잉.”

형들과 누나들의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한국 부부는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당시 의료파업으로 치료마저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아무리 왈가왈부해 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한국 작가를 알아본 담당의사가 성의를 다해 줘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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