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맨 유대지

 유대지 씨가 지난 6월 휴전선 155마일 회단을 마치고 귀환하고 있다. (유대지 씨 제공)

父 향한 애절한 사부곡… 호국영령 넋 기리며 매년 38선 횡단
정전 60주년 맞아 수기집 출판… “평양서 출판기념회 열고파”

[천지일보=명승일 기자]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저를 힘껏 껴안아 주세요.”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강산은 별로 변한 게 없다. 3.8선에서 휴전선으로 남북의 경계선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휴전 상태인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의 가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그 가운데 전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딸을 잃은 가족의 아픔을 그 누가 보상할 수 있을까.

이러한 아픔을 극복하고 전쟁 당시 희생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38선을 횡단하는 이가 있다. 이른바 ‘38선맨’ 유대지(63) 씨. 어머니의 뱃속에서 1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조차 임신한 사실을 몰랐을 때,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경찰 간부였던 유 씨의 아버지는 1949년 3월 북한 인민군 소속 빨치산 부대원과 교전하다 순국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3살일 때 어머니조차 돌아가셨다.

“한 가정에 아버지가 없는 것은 대문이 없는 것과 같고, 어머니가 없는 것은 방문이 없는 것과 같아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대문과 울타리가 없었고, 3살 때는 방문마저 잃어버린 쓰디쓴 비운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겪으면서 성장했죠. 그래서 할머니와 어린 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던 그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고, 이후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싹텄다. 평화통일의 염원까지 품은 유 씨는 지난 1994년 남북이 북한 핵문제로 긴장이 고조됐을 때 ‘전쟁 반대’를 부르짖으며 아내와 함께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휴전선 155마일을 도보로 횡단했다.

그는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세계와 국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후 세대에게 똑똑히 일깨워주기 위해서”라고 도보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후에도 19년 동안 81회에 걸쳐 38선을 횡단하는 등 주위에선 유 씨를 ‘38선맨’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지난 2000년에는 미국의 뉴욕-워싱턴-덴버-샌프란시스코-LA를 잇는 13개 주, 4000km를 렌터카로 완주했다. 북미대륙의 38선에 해당하는 긴 거리를 사상 처음으로 완주하면서 평화수호 의지를 알리는 계기로 삼은 셈이다. 이 같은 기록을 인정받아 유 씨는 지난 4월 올해 최고기록 경기도민 인증서를 받았다.

“평화를 기원하는 작은 심지가 돼 활활 타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부부의 소원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세대가 가득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소망이 바로 고생스런 완주의 ‘작은 불씨’인 셈이죠.”

유 씨는 정전 60년을 맞아 자신의 인생담을 담은 ‘나는 호로자식이 아니야’라는 수기집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길러주신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오롯이 담겼다.

그는 “이 책이 국민과 전후 세대에게 전쟁참상의 교본이 됐으면 좋겠다”며 “다시는 이 땅에 저와 같은 비극의 전쟁유자녀가 생겨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수기집을 ‘나는 호로자식이 아니야’라고 붙인 이유를 묻자 의미심장한 답변이 돌아왔다.

“호로자식은 십대 전후의 연령층 사이에선 아버지가 없는 이들을 주로 일컫고, 성인 사이에선 예의범절이 미흡하거나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 제목을 두고 자신을 너무 비하시켰다는 생각에서부터 저의 처지는 이 용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에까지 알게 모르게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책 제목의 목적이 전쟁 반대인 이상 조금은 달리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증오의 38선을 달리면서, 그리고 그리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이 제목을 끝까지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유 씨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바로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평양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하는 것과 함께 중국어판으로 책을 내고 싶다는 것. 책 수익금의 일부는 UN참전 유족 돕기 성금과 전쟁 양로원을 건립하는 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그는 “정신·육체적으로 허락하는 한 계속 달릴 것”이라는 포부를 전했다.

이어 “전후 세대가 전쟁의 비극을 모르고 국가에 대한 안보의식이 결연돼 있어 안타깝다”며 “우리가 휴전 상태인데 조국의 현실을 직시해서 국가에 대한 안보관을 가졌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유 씨는 또 “아버지의 애국애족 정신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기려 생전에 아버지 동상을 세우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면서 “보훈가족의 복지를 위해서도 여생을 보내고, 아버지의 애국애족 정신을 추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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