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조선중기의 문신 의곡 박정현(1562~1637)이 광해군 1년(1609) 11월부터 인조 13년(1635) 8월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기인 <응천일록>에는 황계탕(黃鷄湯)이 등장한다.

1773년 <승정원일기>에는 ‘연계탕(軟鷄湯)’이 기록돼 있다. 이 당시 등장하는 ‘계탕’들은 건더기 중심이 아니라 국물 중심이었다. 이처럼 닭을 푹 고아 국물을 마신 기록은 이외에도 여럿 남아있다.

17세기 중반에 쓰여 진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는 ‘수중계’가 나오고 1766년에 편찬된 <증보산림경제>에는 ‘총계탕’이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1865)이 지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파 총(蔥)자, 닭 계(雞)자를 쓰는 ‘총계탕(蔥雞湯)’이라는 음식이 나온다.

총계탕은 “‘파를 넣고 끓인 닭국’이라는 말인데, 조리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먼저 살찐 암탉의 털을 뽑고 깨끗이 씻은 다음 내장을 제거한다. 그리고 파 일곱 단을 준비해서 뿌리를 제거하고 흰 부분만 남겨둔다. 여기에 갖은 양념을 쳐서 닭과 함께 한참동안 삶은 뒤 뼈를 발라내고 계란 예닐곱 개를 넣어 먹는다”라고 돼 있다.

정조 19년(1795)에 원행시(園幸時) 음식격식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정리의궤>에 의하면 죽수라(粥水刺) 원반(元盤, 12기)에 진계백숙(진계(陳鷄); 묵은 닭 백숙), 연계증(軟鷄蒸), 조수라(아침수라상) 원반(元盤), 흑칠족반(黑漆足盤), 10기 유기(鍮器)에 연계찜, 주수라(낮수라상) 협반(挾盤)에 연계증(軟鷄蒸), 석수라(저녁수라상) 협반(挾盤)에 초계탕(醋鷄湯)과 함께 계탕(鷄湯)이 등장 한다.

‘삼계(蔘鷄)’란 이름은 개화파 김윤식의 일기인 <속음청사> 1887년 자에 인삼과 닭을 넣고 푹 고은 ‘삼계고(蔘鷄膏)’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1894년 이제마가 쓴 사상의학서 <동의수세보원>에도 삼계고가 설사병 치료제로 등장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 명의(名醫) 손사막이 편찬한 <비급천금요방>에 ‘웅계탕방(雄鷄湯方)’이란 이름으로 소개된 웅계탕(雄鷄湯)이 있는데 ‘물 한 되가 조금 넘게 하고 수탉 한 마리에 한약재인 황금과 백출, 생강, 맥문동, 작약, 대추, 감초, 인삼, 복령, 아교 등을 넣어 삶아 먹는다’라고 돼 있다.

이밖에 ‘오자계탕방(烏雌鷄湯方)’도 있는데 재료는 웅계탕(雄鷄湯)과 거의 같으나 황금과 대추가 빠지고 오수유(吳茱萸)가 들어가는 것이 다른 점이다.

중국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는 웅계탕(雄鷄湯, 수탉고기 국물)과 함께 ‘백웅계우가(白雄鷄尤佳)-황자계(누런 암탉)’가 나오는데, 소갈(당뇨병)을 주로 치료한다. ‘잘 끓여서 국물을 마시는데 고기까지 다 먹어도 좋다’라고 기록돼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