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손들만의 몫이 아닌 정부의 적극적 관심과 후원이 절실

▲ 창경궁 내부.

3년 전 유명세를 탔던 ‘궁’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만화가 박소희 작가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면…’이란 가상의 현실 아래 일어나는 일들을 ‘궁’이라는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19세기 아날로그 세계와 세속적이며 개방적인 21세기 디지털 세계를 절묘하게 조합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이 드라마로 인해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은 왕실과 황태자, 황실 등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동명의 만화와 드라마에서처럼 대한민국이 아직 황실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라면, 만약 일제와 세계열강의 탄압이 없이 왕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는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고 아득한 옛날 옛적의 일로만 생각되는 우리나라 황실의 모습. 그렇지만 이 황실은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했었고 또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역사를 재조명하는 사극이 안방을 차지했고, 또 젊은세대나 기성세대 할 것 없이 즐겨보는 드라마가 됐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네 역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이 황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이 황실이 남아있다면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기 황실을 재건해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역사 속에 사라져간 황실의 모습에 대해 한 번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더불어 황실이 왜 재건돼야 하는지 또한 들어보자.



◆국호 ‘대한제국’은 민족의 위상을 높인 일

지난 2005년 고종황제 손자인 이구 황태손이 세상을 떠나면서 황실 존재가 이목을 끌었다.

당시 이구 황태손 사망 소식을 들은 국민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떠올리며 애도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으나 백여 년 전, 위엄이 서려있는 황실을 비춰 볼 때 호텔에서 마지막 일생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그의 죽음은 황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 됐고, 국민들이 황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고종이 사용한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기 위해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이다. 대한제국의 정식 국호는 ‘한(韓)’인데, 이는 동양의 전통 군주국가 체계 하에서 황제국은 통상 한 글자로, 제후국은 두 글자 이상으로 된 국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호 ‘한’에 대외적 의미의 ‘대(大)’ 자를 앞에 추가하고, 국가의 단계를 의미하는 ‘제(帝)’ 자를 중간에 더하여 ‘대한제국’이 됐다. 일례로,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였다. 한국 또는 대한국을 대한제국이라고 표기하는 것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나라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자주적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이를 받아들인 고종은 1897년 8월 17일 ‘광무’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했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적·간접적으로 승인했다. 그 중 러시아와 프랑스는 황제가 직접 승인 축하했으며 영국, 미국, 독일 등도 간접적으로 승인 의사를 표시했다.

이렇듯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해 탄생한 대한제국은 안타깝게도 1910년 8월 29일까지만 존속됐다.

대한제국의 황실이 사라진 것은 이면적으로나 표면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에서 보이는 것처럼 나라와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려 했던 고종 황제의 생각과 뜻은 가히 존경받을 만하다.
그러나 고종, 순종, 영왕으로 이어지는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잊혀진 지 오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한황실

▲ 고종황제 가족.

다시 말하지만 고종황제로부터 출범한 황실은 강대국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즉,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꿨던 것이다.

안천(서울교대) 교수는 자주국가임을 알렸던 대한황실이 사라진 이유로 일제침략과 맹목적으로 수입된 민주주의 이론을 꼽았다.

안 교수는 “황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큰 계기는 일제침략이다. 그 당시 일본은 정치 핵심인 황실을 가장 먼저 공격해 완전히 녹여 없애려고 일을 꾸몄다”며 “이승만 정권 시대 때 해외에서 맹목적으로 수입된 민주주의의 역기능 또한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분개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빼앗겼던 조국을 되찾을 때 일제침략자가 망쳐 놓은 문화에 미국의 것을 맹목적으로 옮겨놓으면서 우리의 본연을 잃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교육제도가 우리에게 그대로 이식되면서 정신과 혼을 잃은 것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실문화 복원을 위한 뚜렷한 정당성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황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가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황실문화 복원 모임이 조용하게 일고 있다.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 11번째 아들인 이석 황손을 주축으로 모인 ‘황실문화재단’이 대표적이다. 또 황실문화를 알리고자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의 차녀인 이진(본명 이지인) 원장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황실예술원 진’을 만들었다.

황실문화재단과 황실예술원 진을 포함해 황실문화 복원에 뜻을 둔 사람들이 밝힌 ‘황실문화 복원의 정당성’은 한결같다.

안천 교수는 황실이라는 매개체가 민족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만들고, 잃어버린 어른문화를 회복할 수 있다며 정당성을 설명했다.

그 외에도 ▲원만한 민주문화 수립 ▲신생국 사고 탈피 ▲애국선열 의지 구현 ▲민족통일의 기본준거 ▲정치문화의 한국화 ▲관광입국의 대들보로 나눠 설명했다.

이석 총재 역시 안 교수와 뜻을 같이 했다. 이 총재는 전통과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 상징적인 황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영국·벨기에 등 황실국가가 있는 나라는 국가 정체성과 전통이 살아있다”고 말했다.

이진 원장은 황실문화 복원에 대해 “그 시대 고급문화 집합소를 역사 속에 흘려보내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며 “황실문화 복원은 황손들만 나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이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앞에서 말한 바 황실문화가 미치는 영향은 대외적으로 위상을 드높일 수 있고 국민 정서에도 긍정적이다.

또 최근 동의보감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등 우리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때에 황실문화가 복원된다면 지금보다 수준 높은 문화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대한제국 황실 연구만 20여년
안천 서울교대 교수 인터뷰

▲ 서울교대 안천 교수.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사라진 대한황실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20여년이 넘는 시간을 황실 재건과 황실 후손들을 찾아다니는 데 쏟았다.

안 교수는 교수 초년 시절, 정치학 강의를 하면서 왜 우리 것은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우리의 기나긴 역사가 일제에 의해 끊겨 공백이 생겼는데 그것을 미국의 제도가 대신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황실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는 안 교수는 “500년 역사의 대한황실처럼 당당히 이어졌던 황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어렵다”며 “다만 일제침략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민족의 구심점을 잃고, 나라의 어른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대 정치사”라고 말했다.

그는 “일제침략으로 끊어진 황실 역사는 결코 부끄러운 역사만은 아니다”면서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오도되고 왜곡된 채 버려져 있을 뿐 분명히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의 황실연구는 소설 ‘왕조의 후예(삼신각)’를 쓴 강용자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과 ‘노래하는 황손’ 이석 씨를 만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세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1991년 ‘대한황실복원추진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1992년 2월 대한황실복원추진회를 시작으로 지금의 황실문화재단이 탄생하게 됐다.

안 교수의 황실복원에 대한 열정은 그의 사재를 다 헐어 연구에 임할 정도로 뜨거웠다. ‘황실을 복원해 임금님을 다시 모셔야 한다’는 일념으로 쏟아낸 안 교수의 연구 논문들은 서양 민주주의와 정치체제에 길들여져 있는 관점에서는 하나의 ‘학문적 도전’이었다.

안 교수는 황실이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고, 버려진 이유로 일제의 식민사관과 황국사관, 친일사관, 당시 정권의 황실 탄압 등을 지목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자 정치핵이었던 황실을 별볼일 없고 무능, 무력, 부패한 존재로 교묘하게 유도하고 선전함으로써 국민 스스로가 황실을 매도하고 자기 역사를 부정하게 하는 간교한 정책”을 쓴 것이다.

안 교수는 “그동안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의 선전인 줄도 모르고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망했다는 등의 허망한 역사를 가르쳐왔다. 황실도 마찬가지”라며 “역사인식의 주체를 바꿔서 보면 우리 민족은 36년간 망한 것이 아니라 36년간 침략자들과 혈전을 펴며 쫓아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황실에 대한 사랑은 황실복원에 대한 많은 논문들을 낳았고 더 나아가 황실복원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황실복원 작업은 ‘진행형’임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열정과 노력의 산물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 교수가 황실복원의 정당성으로 내걸었던 민족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하는 매개체, 잃어버린 어른문화의 회복, 원만한 민주문화 수립 등은 현 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혹여 황실복원이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황실문화가 갖는 이점(利點)은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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