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일화 한 토막. 오래 전 어느 경제부처 관련 상임위에서 있었던 해프닝이라고 한다. 한 국회의원이 국정감사 피감기관 기관장을 상대로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그 국회의원은 꼼꼼히 수집한 증거자료를 들이대며 송곳질의를 벌여 기관장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기관장은 답변을 제대로 못하고 쩔쩔맸다. 추궁하는 의원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고 답변자는 시간이 갈수록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양이 앞의 쥐 형국이었다. 수세에 몰렸던 기관장이 갑자기 답변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이렇게 외쳤다.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어제 저녁에 의원님이 부탁한 민원도 다 해결해줬는데….”
기관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앞에 놓여 있던 답변자료 뭉치를 손으로 집어 의원석 쪽으로 던져버렸다. 서류 보따리가 회의장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국감장은 소란해졌고 휴회가 선언됐다. 당황한 그 의원은 서둘러 질의를 중단하고 얼굴이 벌게진 채 자리를 빠져 나갔다.

필자가 국회출입기자 시절 선배 언론인에게서 전해들은 얘기다. ‘7080’ 에피소드라고 하니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모른다. ‘설마 그랬을까’ 의심스런 일화다. 정치인은 이미 고인이 돼 사실 확인도 쉽지 않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그가 금배지를 단 목적이 의원직을 이용해 청탁을 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것을 즐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의구심도 든다.

세월은 흘렀지만 피감기관장이 의원들의 추궁에 쩔쩔매는 모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피감기관장이 해당 상임위 국회의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풍경은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다. 낮과 밤이 다르다. 낮엔 진지하고 열띤 추궁과 함께 때로는 고성(高聲)도 오가는 반면, 저녁 식사자리에선 술도 한 잔 돌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뀐다. 그런 가운데 민원사항을 귓속말로 의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역민 이해관계나 인사 청탁에 관한 것도 거론되는지 모른다. 골치 아프고 귀찮은 지역구 민원 건이 오죽했으면 한 국회의원은 필자에게 “민원만 없다면 국회의원도 할 만한 일인데…”라고 볼멘소리를 사석에서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민원 없는 세상’에 살게 할 순 없는가.

#합법적으로 하루에 수억 원을 쉽게 끌어 모을 수 있는 ‘책장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인 출판기념회다. 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한 여당 국회의원의 출판기념회엔 1000여 명 안팎의 인파가 몰려 북적댔다. 여야 의원은 물론, 장관 등 고위공직자, 지방자치단체장, 대기업 관계자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대략 한 사람당 10만 원의 책값을 지불했다고 치자. 계산해보면 이날 1억 원이 넘는 돈봉투를 끌어 모은 셈이 된다. 그러나 정치후원금과 달리 출판기념회 모금은 한도가 없다. 수백만, 수천만 원을 내도 된다. 순식간에 큰돈이 모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그는 바로 엄청난 국가예산을 주무르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이었다고 한다. 이에 동참한 사람들은 과연 예산 배정에 관한 모종의 기대감도 없이 그냥 참석했을까. 거저 주고 거저 받는 관계였을까. 공직자들이 지불한 책값, 화환값은 아마 국민 세금일 텐데. 기업인이 낸 봉투도 비용처리하는 회사 자금일 텐데. 그렇다면 속이 환히 들여다뵈는 ‘상(商)행위’가 아닌가.

#비용(cost)은 소비자(consumer)에게 전가(轉嫁)된다. 네이버 키워드를 보자. 예컨대 ‘대출’이라는 키워드만 해도 ‘파워링크’에 업체 이름을 올리려면 클릭당 1만 원 내지 2만 원 가까운 경비를 부담해야 한다. 경쟁업체가 고의적으로 100번을 클릭하면 광고비 100만~200만 원이 금세 지출되고 만다. 공짜는 없다. 투자 효과가 있으니까 광고비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용은 결국 소비자가 상품 값에 포함해 부담한다. 이러한 원리가 돌고 돌아 시장경제를 넘어 혹시라도 정치권까지 지배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정치인에게 주는 돈은 소비자인 국민이 부담하는 준(準)조세이니까. 또한 어떤 식이건 대가(對價)가 있다면 뇌물이니까. 

국회의원은 많은 특권을 행사하는 만큼 한층 높은 윤리의식과 깨끗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대의제(代議制) 한국정치의 질이 낙후된 이유는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권력을 자신이 어렵사리 획득한 특권으로 아는 ‘선거꾼’들이 민의의 대표자를 빙자하여 사유화하고 대가를 뽑으려 하는 것도 중요한 한 이유가 아닐까. 고비용 저효율 정치가 문제다. 돈 안 들고 돈 안 쓰는 정치는 정말 안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공천헌금은 정말 옛 얘기일 뿐인가. 차명거래와 비자금이 허용되는 금융실명제법은 왜 아직도 그대로인가.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서라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는가. 완전한 선거공영제는 공염불에 불과한가.

나아가 우리의 국회의원이나 장관직도 영국이나 스위스처럼 순수하게 봉사하는 무보수 명예직이면 어떨까 한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예롭지 않은가 말이다. 정치의 힘은 크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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