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구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미국 하와이 퀸스병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사진출처: 뉴시스)

세계 누비며 한평생 봉사의 삶
대북 지원사업에 큰 족적 남겨
종교간 화합과 상생에도 노력

봉사를 넘어 무소유 삶 실천
상대 신분 따지지 않고 만나
깊고 묵직한 울림 남기고 가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를 생각하면 잠이 오질 않습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이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윤구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미국 하와이 퀸스병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 총재는 사석에서 ‘나는 평생 땅 한 평 가진 적이 없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인제대 총장, 적십자사 총재, 한동대 석좌 교수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력과 달리 그는 한평생 낮은 자, 없는 자에게 ‘퍼주는 삶’을 살며 자신의 이름으로 된 땅 한 평, 집 한 채도 없이 빈손으로 살다 떠났다.

많은 이들은 대북사업에 발 벗고 나섰던 이윤구 총재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2004년 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 취임 후 의욕적으로 대북 사업을 벌였다. 특히 같은 해 6월에는 대형 폭발사고가 난 평안북도 룡천 현지를 직접 방문했다.

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선 국수 공장을 만드는 등 인도적 대북 지원사업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평소 ‘북한 동포를 위해 내가 한 것이 없어서 (죽으면) 하나님을 어떻게 봬야 할 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통일에 무관심한 젊은이를 만날 때면 한민족에게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고, 목이 곧은 정치인들을 향해서는 책망도 주저하지 않았다.

▲ 이 총재는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회의 이사장을 지내며 복지 사각지대 돌봄사업 ‘함께 살아요 고통을 나눠요’에 직접 참여했다.

◆남김없이 준 봉사의 삶
이 총재는 대한민국 자원봉사계에 새 지평을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 “선진국은 자원봉사율이 30~40%에 이르지만 우리나라는 6%에 불과해 부끄럽다”면서 “의식이 성숙해야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이 총재는 국제구호개발기구 한국월드비전 회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인도적 지원사업에 헌신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유니세프, 유엔과 연계해 전 세계 120개국 재난, 빈곤 지역을 돌며 평생 봉사하는 삶, 나누는 삶, 소유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가 그런 삶을 살게 된 동기는 두 여인 때문이다. 한 여인은 6.25 피난길에 얻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등진 자신의 어머니였다. 그는 어머니 무덤 앞에서 ‘어머니처럼 전쟁에 시달리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한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전쟁의 상처는 그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했고, 한 평생 신앙인의 삶을 산 계기가 됐다.

그가 봉사를 넘어 무소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은 군산 도립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한 소녀 때문이었다. 생활고를 못 이겨 양잿물을 먹은 소녀의 입 안과 목은 이미 시커멓게 타 있었다.

당시 체이커 봉사단원이었던 이윤구 총재를 만난 후 소녀는 다시 살기를 바랐지만 이 총재가 휴가를 받아 자리를 비운 사이 보리밥을 목에 넣다 질식해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슬퍼하고 참회하던 중 이 총재는 ‘삶이 힘든 것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평생을 나와 내 가족보다 이웃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그의 다짐은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대학 때는 기독학생회에 속해 방학마다 근로봉사를 했다. 고아원을 짓고, 밭을 일구며, 각국에서 모인 청년들과 토론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일찍부터 시작된 봉사의 삶은 그의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됐다.

유엔 아동영양특별위원회 사무국장, 유니세프 (이집트 인도 방글라데시) 대표 등을 지내며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섬기며 울고 웃었다. 국내에서는 수많은 봉사단체를 맡아 소외된 이들과 함께했다. 2007~11년까지는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인추협) 이사장을 지내며 복지 사각지대 돌봄 사업 ‘함께 살아요 고통을 나눠요’ 캠페인에 적극 동참했다.

▲ 에티오피아에 있는 양자들과 함께한 이 총재.

◆종교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전도사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타 교단이나 종단을 배척하는 것과 달리 이윤구 총재는 일찍부터 종단을 초월한 화합과 상생을 실천해 종교계에도 큰 귀감이 됐다.

종교연구가이자 민중운동가로 씨알사상을 전하며 종교화합에 앞장섰던 故 함석헌 옹을 비롯해 종교 화합에 앞장섰던 국내외 종교 지도자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어디든 발걸음을 옮긴다’는 마음으로 만남을 청하는 상대의 신분이나 소속을 따지지 않았다.

이 총재는 2010년 ‘사회 화합과 종교 상생의 길, 원로에게 묻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본지 신년대담에서 “과거에 간디 선생을 만나면 그분은 크리스천인 나에게 ‘한 걸음만 바로 걷게 해 주세요’라는 찬송 구절이 너무 좋다고 불러 달라 하셨다”는 일화를 전했다.

그는 당시 “모두 한걸음만 더 바로 걷는 한해가 되길 바란다”면서 “종교는 처음부터 가진 것 없이 다 내 놓는 것이다. 나는 내 이름으로 등기된 것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세상 떠날 때 가볍다.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제는 유언이 돼 버린 그의 말처럼 이윤구 총재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온전히 베푸는 삶을 살다 떠났다. 그는 가볍게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진실한 삶의 족적만은 깊고 무거운 울림이 돼 길이 전해질 것이다.

▲ 이윤구 총재는 종교화합에도 앞장섰다. 故 함석헌 옹과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었다.

*故 이윤구 총재
서울출신으로 1957년 중앙신학교 사회사업과를 졸업하고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1981년 유엔아동기금(UNICEF) 이집트ㆍ인도ㆍ방글라데시 대표를 수행하며 공적인 활동을 시작해 한국월드비전 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인제대 총장,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 이사장, 한동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199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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