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서도 아침 점심 저녁 짬이 날 때마다 노래에 미쳐 지냈다. 무슨 일에나 한번 불이 붙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게 그의 천성이지 않은가. 또다시 군대에서 노래자랑에 나갈 때처럼 목에서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그 일로 의사로부터 한동안 숨만 쉬고 지내라는 엄명을 받기도 했다. 이런 집념으로 노래에 매진한 결과 그의 목에 군살이 박혔을 즈음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서울에 사는 그의 자취방으로 쫓아와, 너와 나 둘 중 누가 먼저 죽나 보자면서 단식투쟁에 들어가셨다.

이눔아, 느그 애비만 해도 내가 한이 맺혔는디 자식까지 대를 물려? 하이고, 수십 년 붓글씨는 어디에 내뿌리고, 니가 미치고 환장한 것이지라?”

이 당시 한한국이 노래에 홈뻑 빠져들 건 그 동안 수많은 일을 해봤지만 모두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래만이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몹쓸 바람이 들었다면서 노래하는 것을 극구 말렸다.

이눔아, 어려서부터 꾀꼬리 같다는 소릴 들었으면 모르건는디 그간 글씨 잘 써오다가 무슨 지랄이냐? 한 몸에 두 지게는 못 지는 벱이다.”

어머니의 이런 극단적인 반대에도 한한국은, 자신의 노래 실력을 증명해 보이면 허락을 할 것 같아 어머니 몰래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그 첫 번째로 동서울터미널에서 열리는 강동구민 노래자랑에 출전했다. 거기서도 장은숙의 <못잊어>를 불러 2등을 했다. 원래는 1등인데 함께 출연한 70대 노인이 아주 잘 부르셔서 어르신의 나이를 참작해 등수가 바뀐 것이라고 했다. 이 일로 어머니의 반대가 다소 누그러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가서 화순에서 용하다는 점쟁이 선산 댁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식이 이러저러해서 속을 썩인다고 했더니 선산 댁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냅두쇼! 진즉에 내가 그 아들 그런 걸 알았어라. 성님집 지낼 적마다 봤는디 그 아들은 붓쟁이, 말쟁이, 소리쟁이가 될 것이었지라! 그렁께 지 맘대로 하게 냅두시오.”

선산 댁,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한다요?”

그건 한국이 아빠한티 맞아 죽을까봐 그랬지라. 근디 그 아들 앞길 막으면 죽어버링께 못 본 체 냅두시라 말이싱!”

이런 소리를 듣고 보니 어쩔 수 없으셨던지 어머니는 며칠 후에 다시 서울로 아들을 찾아와 당조짐했다.

타고난 팔자는 못 어기나부다. 느이 아부지두 그랬니라. 그렁께 너두 정 노랠 하구 싶으면 맘대루 하라고잉. 하지만 어디까지나 글씨가 우선인 겨. 그건 한석봉 조상님의 후예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지라. 그렁께 글씨가 우선이구 그 다음이 노래란 말이시! 한국아! 나두 오늘부텀 밥 묵을란다. 대신 나랑 약조하자. 첫째는 네 이름이 한국이니 그 이름에 누가 안 가게 히야써. 둘째는 술 담배를 안 할 수 있냐? 셋째는 유흥에 타락해선 신세 망치는 지림길이여.”

, 그 세 가지 다 약조 드립니다.”

그래서 한한국은 지금까지 담배는 한 번도 안 피웠고, 술은 부득이한 자리에서만 조금만 하고 있다. 그리고 유흥은 글씨를 쓰는 것으로 대신 풀어버린다.

 

한한국이은집 공저

▲ ●작품명: 공존 ●작품크기: 가로 1m 80㎝ x 세로 2m 80㎝ ●제작년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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