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임문식 기자] 목야전쟁은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전쟁으로 BC 1027년 허난성 목야에서 벌어졌다.

주나라는 은나라 말기에 지금의 섬서성 위수(渭水) 유역에서 일어났다. 은과는 다른 민족이었던 주는 은과 왕래하면서 대부분의 문화를 흡수했다. 주의 시조 희기(姬棄)의 후예인 계력(季歷)과 아들 창이 은왕으로부터 서백(西伯)이라는 작위를 받기도 했다.

창은 농업경제를 토대로 대외 팽창을 시작했다. 위수의 남쪽까지 확장한 그는 지금의 섬서성 악현(鄂縣)의 동쪽인 풍(豊)으로 천도했다. 동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종주국 은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BC 1101년 발(發)이 무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강상(姜尙)과 동생 단(旦)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증강해 제후들을 규합하고 은을 멸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했다. 즉위한지 2년 후에 무왕은 동진해 맹진(孟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했다.

무왕의 1차 출전은 세력점검을 위한 것이었다. 무왕이 여러 동맹자의 권고에도 도강을 감행하지 않은 진짜 까닭은 군사력 부족, 도강작전에 필요한 장비 결핍, 내부의 분규발생 가능성, 은의 중심인물이었던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의 건재 때문이었다.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무왕은 공격을 중지했지만, 은은 이미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은의 지배층은 여전히 백성을 착취해 민심을 잃고 있었으며, 곳곳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2번째 출전한 무왕이 조직한 연합군은 목야에서 주왕의 군대와 만났다. 이 무렵 은의 주력부대는 목야에서 멀리 떨어진 동남쪽 회수(淮水) 지역에서 동이족과 싸우고 있었다. 주왕의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주왕은 녹대(鹿臺)에서 분신자살했다.

목야에서의 승리는 은왕조의 중앙정부를 무너뜨린 것에 불과했다. 영토가 넓어 상당한 세력이 남아 있었다. 정복자는 그들의 반발을 의식해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회유정책을 폈다. 이것이 주의 봉건제도였다. 목야전쟁은 중국의 역사가 시작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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