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도 가족이 최고지!”

그럼요! 한국이가 우리 조상님 한석봉 명필의 후예이니 당신도 나도 땡 잡은 거죠.”

매형과 누나가 이렇게 번갈아 가며 비행기를 태우니 거절하기가 난감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붓을 잡고 쓰고 가르치면서 즐겁고 보람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는 길에 암사동 사거리에 그 즈음 한창 유행바람을 타던 가라오케가 보였다. 당시에는 500원을 기계에 넣으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평소 18번 노래인 장은숙의 못잊어를 기똥차게 뽑아낸 것이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순간 그에게 갑자기 잊어버렸던 추억이 생각났다.

맞아, 나에겐 노래도 있었지! 왜 그걸 까맣게 잊고 살았을까?’

72사단에서 모필병으로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인기가수였던 김흥국, 방실이, 남궁옥분 등이 위문공연을 와서 부대가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내무반에서 뜬금없이 그에게 네가 졸병이니 부대 노래자랑에 출전하라는 것이었다.

저요? 붓글씨 수난의 먹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이번엔 노랠 하라고요? 못합니다, 아니 안합니다!”

어이구, 저 쫄따구가 간이 배 밖으로 탈출을 했나? 까라면 까!”

별 수 없이 한한국은 주병선의 <칠갑산>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한한국은 어떤 일이나 한번 시작했다 하면 끝장을 보는 성미라서 목이 쉬어 말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무리하게 연습을 했다. 오히려 노래 연습이라기보다 무조건 악만 써댔던 것 같다. 갑자기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울컥 넘어왔다. 깜짝 놀라 의무대로 뛰어가니 의무관이 약을 주며 말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노래 연습을 중단했다가 위문공연이 펼쳐지는 당일 무대에 올라 <칠갑산>을 부르니까 목소리가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포상 휴가까지 받게 되었다.

행사가 끝난 후 무슨 일 때문인지 김흥국 가수가 불러서 갔더니, 그에게 명함을 한 장 주면서 제대하거든 자기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맞아, 내가 그걸 잊었었구나! 붓글씨보다야 스타 되는 게 훨씬 낫지!’

노래에 대한 추억에 불이 지펴지자 한한국이 가라오케를 찾는 날이 잦아졌다. 또다시 추억에 젖어 <못잊어>를 열창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도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손님 한 명이 명함을 주며 찾아오라는 것이 아닌가. 명함을 보니 꽤 유명한 작곡가 K씨였다. 며칠 후 종로로 그를 찾아갔더니 가수 이은하의 아버지란 분도 와 계셨다. 거기서 오디션을 보고 나자 작곡가 K씨는 매월 수강료로 18만 원을 내라고 했다. 매형네 학원에서 돈을 벌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부담 없이 K 작곡실의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노래가 별로네. 목소리는 너무 좋은데. 암튼 가수는 목소리가 가장 중요하니까 앞으로 잘해 봐요.”

작곡가 K씨가 그의 노래를 듣고 나서 말했다.

그 말에 오기가 생긴 한한국은 곰곰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자신이 바이브레이션이 잘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노래가 밋밋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한한국은 목에 개목걸이를 감고 성대의 떨림을 훈련했다. 그렇지만 노래 연습 역시 붓글씨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더 고되었다.

주로 나훈아의 모창을 하며 연습했는데 시끄럽다는 주변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아무데서나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올림픽대로변의 나무가 우거진 숲에 가서 노래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한한국이은집 공저

▲ 지난 2010년 10월에 열린 G20정상회의국회 한한국 특별전 개막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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