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써보자. 글씨의 크기와 위치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이 안 오지만 밤송이로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군대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두 장을 버리자 인사계의 욕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이 새끼야! 어찌 된 거야? 저번엔 잘 쓰더니? 표창장도 못쓰는 게 무슨 모필병이야?”

대필과 세필은 다릅니다.”

한한국이 모기만큼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인사계의 울화가 폭발했다.

쓰벌놈, 영창 갈래? 내일 아침이면 동원병력 다 빠져나가는데 언제 주라고? ?”

인사계님! 한 이병이 날이 추워 손가락이 시려서 그런 것 같으니 좀 녹여 주죠?”

누군가의 말대로 라이터로 촛불을 붙여 그 열로 손을 녹였지만, 근본적으로 표창장 같은 글씨는 써본 적이 없어 그런 것이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실력도 안 되는 놈이 간땡이가 부어 순전히 사기 친 거잖아? 너 이 새끼, 죽을래?”

다음 순간 인사계는 총개머리로 한한국의 파이버를 내리치고 턱을 잡아 올려, 언젠가 그가 중국집 주인한테 따귀를 맞을 때처럼 아주 잔인하게 양 뺨을 올려붙였다.

얌마! 네가 한석봉이면 난 한석봉 할아비다! 어디서 굴러온 쓰레기 같은 새끼야?”

인사계의 발광이 너무도 심하여 그때 한한국은 당장 군대의 단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꺼내 그의 앞에 내던지며 죽어버리고 싶었다.

자식아, 내가 똥구멍에 붓을 끼워 써도 너보단 잘 쓰겠다.”

아아! 내가 왜 다시 붓을 들었단 말인가? 붓도 벼루도 글씨도 남김없이 깨버리고 불태웠는데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살다 살다 이런 모욕과 치욕은 처음이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면서 차라리 북한의 김정일이 쳐들어와 전쟁이라도 터져라!’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천벌 받을 소리지만 순간 한한국은 마음속으로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다. 그러고는 인사계로부터 온갖 욕설과 폭행을 당하자 갑자기 그의 허리에 찬 권총을 빼앗아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그에게 일격을 가해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헌병대에 끌려와 있었다.

이 새끼 영창에 처넣어!”

결국 그는 3일간 헌병대에 끌려가 군기교육대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한한국은 가까스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시 살아났으니 앞으론 절대로 붓을 놓지 않겠습니다. 이제 먹물이 없으면 저의 핏물로 글씨를 쓰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한국의 사정을 알게 된 헌병대장이 그의 딸이 졸업을 하니 기념 휘호를 한 장 써 달라고 했다. 그간 자신의 다짐대로 열심히 닦아온 붓글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써주었더니, 역시 한석봉 후예라서 명필이라며 무척 기뻐하는 것이었다. 헌병대장은 그 길로 한한국의 부대를 찾아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한한국에게 반성의 진술서를 쓰게 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모필병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으니, 군대는 그의 붓을 죽이기도 하고 또한 살리기도 했던 것이다.

사람의 앞길은 한 치 앞도 모른다. 아침을 잘 먹고 직장에 나간 남편이 웬 묻지마 살인광을 만나 목숨을 잃는 게 요즘 세상이다. 그처럼 한한국도 군대에서 다시 찾은 붓을 꺾고 생뚱맞게 노래의 길에 빠져버리게 된 것이다.

군대에서 다시 붓을 잡은 후 한한국은 주로 사단장의 경조 화환 글씨를 썼는데, 명필로 소문이 나서 당시 사단장의 친구였던 우리나라 3대 그룹 중 하나인 00그룹의 김00 회장에게까지 알려져, 그곳에 스카우트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셋째누나와 결혼한 매형이 마침 암사동에서 00보습학원을 크게 내어 서예반, 속셈반, 영어반을 비롯한 복합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와서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서예반과 원감을 맡게 된 것이다.

한한국이은집 공저

▲ ●작품명: 희망대한민국 백자 ●제작년도: 2008년 ●작품크기: 높이 70㎝ x 둘레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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