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CP8명 남짓한 신병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훈련소에서 만났던 백이 센 신병들이었다. 한한국이 그 자리에 불려간 것은 이번에도 역시 이름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한지가 펼쳐져 있고 벼루와 붓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 한한국 신병! 너도 글씨 써봐!”

이때 인사계가 한한국을 향하여 명령하듯 소리쳤다. 그러자 한한국이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전 글씨는 안 씁니다!”

뭐야? 안 써? 대가리 박아!”

그래도 안 씁니다!”

? 너 미쳤냐? 까라면 까야지!”

절대로 안 씁니다.”

강경하게 그가 거부하자 이번엔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얌마! 너도 참 답답한 놈이다. 얘들 쓰는 것 보고 너도 써봐.”

이윽고 불려온 다른 신병들이 붓글씨를 쓰는데 고작해야 초등학교 수준이었다. 그 모습이 한심해 그제야 그가 붓글씨로 한한국이라고 이름을 쓰자 고참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 너 정체가 뭐야? 뭐 하던 놈인데 이런 글씨를 써? ?”

한한국은 하는 수 없이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붓글씨를 써온 내력을 좔좔 불어버리고 말았다. 한번 말이 터져 나오자 못할 것도 없었다.

, 애들은 가라잉!”

한한국은 당장에 부대의 모필병으로 뽑히고 말았다. 그리고 곧장 고참 모필병 사수 대신 졸병인 한한국을 그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군대조직이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한직으로 밀려난 사수가 앙심을 먹고 한한국에게 업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인수인계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 명필 한석봉! 오늘밤 안으로 작업 완료한다. 알겠나?”

인사계가 표창장 용지를 잔뜩 가지고 왔다. 한한국이 자대로 전입 와서 겨우 일주일쯤 되었을 때,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으로 부대가 포천으로 이동했다. 예비군도 합동작전을 벌였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7일 동안 그야말로 지옥훈련이 되었다. 그렇게 한미 팀스피리트 작전을 마치고 고생한 군과 예비군에게 수여할 표창장을 30장 쓰라는 지시였다.

내일 아침에 사단장님께서 직접 수여하시니까 오늘밤 취침 전까지 써놓도록!”

인사계는 다시 명령을 하면서 연필로 쓴 표창장 내용과 명단을 보여주었다. ‘,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순간 한한국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간 모필병 사수가 일체업무를 가르쳐주지 않은 데다 붓글씨 연습도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한한국은 손을 놓은 채 공백의 표창장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더욱이 그동안 큰 붓글씨만 썼지 이런 세필은 전혀 손에 잡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냥 그대로 있을 수만도 없어 직접 써보니, 우려했던 대로 파지만 연속해서 3장이나 나왔다.

뭐야? 아직도 못 썼어? 빨리 써! 별 둘 사단장님이 깜짝 놀라시게 잘 써보라고! 넌 한석봉의 후예잖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인사계가 더욱 독촉을 해댔다. 여전히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다시 붓을 잡았다.

 

한한국·이은집 공저

▲ ●작품명: 福 ●제작년도: 2013년 ●작품크기: 지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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