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연재] 평화대통령 한한국 (83)
[논픽션 연재] 평화대통령 한한국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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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옵쇼! 여기 물 끝내줍니다.”

발랑 까지고 닳아빠진 웨이터들은 어두운 홀 안을 제비처럼 기차게 날아다니며 손님을 받았지만, 한한국은 미성년자라 고작 화장실 청소로 변기나 닦아야 했다. 지금 같으면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를 했겠지만 업소에서는 고무장갑이 아깝다며 맨손으로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장실을 비까번쩍하게 닦으라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스탠드바에선 침식이 해결되었고, 영업이 끝나고 다음날 오후 서너 시까지는 자유시간이어서 붓글씨와 고시공부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영업이 자정 넘어서 끝나면 이런저런 뒷정리와 청소로 새벽 두어 시가 넘어야 잘 수 있었다. 게다가 나쁜 공기와 온갖 취객들의 추태를 다 받아주다 보면 신경이 곤두선 탓인지 유난히 피곤했다.

, 이 새끼들아! 홀랑 벗고 집합! 동작 고거 밖에 못해?”

한한국이 취직하고서 사흘 후부터 다시 부활된 스탠드바의 기괴하고도 끔찍한 점호는 충격을 넘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조폭인 주인은 하수인인 대장을 시켜 15명이 넘는 웨이터와 보조들을 팬티까지 홀랑 벗긴 알몸으로 불러 모아 매일 밤 몽둥이찜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군대에서 군기를 잡는 행태와 같았다.

그때 미성년자인 한한국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결국 그곳도 얼마 못 버티고 탈출하듯 뛰쳐나와야 했다.

이젠 군대나 가자!”

봉제공장에 다닐 때 공장 주인이 군 입대 연기신청을 해준 적이 있는데, 이는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한 덕택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른 핑계거리도 없으니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1987년에 입대한 부대가 송추에 있는 72사단으로 88올림픽부대였다. 군대에 가면 누구나 사회에서의 경력을 써야 했지만 그는 붓글씨에 대한 경력을 숨겼다.

군대까지 와서 말할 필요는 없다. 붓글씨로 먹고살 수 없는 이상 이젠 버려야 한다. 고작 서예 강사나 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게 될 것인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 한한국은 그토록 힘겨운 환경에서도 애지중지 간직해 온 붓과 벼루를 모조리 깨버렸다. 심지어 그동안 써온 붓글씨도 남김없이 불태웠다.

이제 한한국에게 글씨는 없다! 모두 끝이다! 벼루야, 붓아, 내 글씨들아. 잘 가거라!”

그때 깨어지고 불타는 벼루와 붓과 붓글씨를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한한국은 기어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었다.

막상 입대를 하고 나니 지금까지 그가 지내온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고등학교를 몇 군데나 합격하고도 포기해야 했던 일이며, 대입검정고시를 위해 서울 누나네로 와서 독서실과 영등포의 한림학원을 다니던 일이며, 중국집 알바를 하다가 따귀를 맞은 일이며, 한샘학원에서 서너 살이나 위인 친구를 만나 도시락을 얻어먹은 일 등이 차례로 떠올랐다. 또한 봉제공장에서는 기계에 다쳐 하마터면 손가락을 잃을 뻔도 했고, 구두닦이를 할 때엔 어떤 신사 아저씨의 훌륭한 관상이란 말에 용기를 가져보기도 했다. 그뿐인가? 속기도 배우고 디자인도 배웠다. 하지만 마지막 스탠드바에서의 악몽은 평생을 가도 상처로 남을 것 같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한한국이 그토록 목숨처럼 붙잡고 살아온 붓글씨를 버렸다.

그래, 군대에 와선 절대로 나의 과거를 밝힐 수 없어.”

이런 다짐으로 그는 끝내 글씨의 경력을 비밀로 했던 것이다. 대신에 사법고시를 공부한 사실을 적어냈다. 그런데 송추에 있는 72사단은 서울과 가까워서인지 훈련병들 중에는 국방장관, 국회의원, 재벌급 CEO의 자제들과 소위 SKY대학 출신들이 우글거렸다. 말하자면 더블백이 아니라 진짜 백으로 군대에 온 그들이었다.

 

한한국이은집 공저

▲ ●작품명: 나눔 ●제작년도: 2013년 ●작품크기: 높이 35㎝ x 둘레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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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일 2013-08-30 15:26:27
고생이 너무 많았네요 그러나 고생이 나중에 인생에 도움이 되고 선생이 되는것 같더라고요

강나림 2013-08-29 20:07:51
조폭주인의 이상한 행동에 정말 많은 충격이 되었을것 같아요 벼루까지 다 깨고 글씨도 불태우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위인전을 읽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