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필시 설화(舌禍)가 있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느낌이 적중했다. 대통령의 고위 참모 한 분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거위 털을 살짝 빼는 것이 세금 걷는 것’이라고 했다.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이 발언이 전파되자 국민들은 잔잔한 바다가 거친 바다로 돌변한 것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원래 이 말은 중세 프랑스 임금 루이 14세 때의 재무상 콜베르가 한 말이라나 어떻다나. 프랑스 사람들은 거위 간을 즐긴다. 그 거위 간을 키워서 즐기기 위해 고통을 주어 거위를 잡는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잔인하지 않은가.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털을 살짝 뺀다’는 말은 국민들의 조세 저항을 유발하거나 조세 마찰을 빚지 않는 고난도의 징세(徵稅) 묘기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콜베르가 그 같은 기술을 새 털이나 닭털, 오리털 뽑는 것에 빗대지 않고 하필 거위털 뽑는 것에 자연스럽게 빗댄 것은 그 역시 거위의 간 요리를 즐기는 프랑스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떻든 아무리 절대 왕권을 가진 왕과 그 신하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던 시절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말이 국민들에게 온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리는 없다. 물어보나마나 부글부글 들끓지 않았을까. 콜베르 말대로, 거위 털이 세금이라면 그 세금, 즉 거위 털을 뽑히는 국민은 거위가 돼야 한다. 물론 콜베르가 프랑스 국민을 꼭 거위로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얼마나 국민을 비인간 취급하는 능멸인가.
털을 몸에 지닌 모든 동물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철이 바뀔 때 더위와 추위에 잘 적응하도록 털갈이를 한다. 거위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때가 되어, 털이 저절로 빠지면 모를까 어떻게 살아있는 거위의 생 털을 뽑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게 뽑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설사 환상적인 무통의 거위 발모(拔毛)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금이라면 국민들은 거위 털이 뽑히는 고통이 아니라 거위 간이 적출당하는 고통으로 공감했을 것 같다. 세금은 특히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큰 고통과 박탈감을 안겨주며 도(度)가 지나치면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를 것이 없다.

콜베르가 징세 기술을 자랑하던 루이 14세 때 프랑스의 국가 재정은 서서히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러 번의 전쟁 수행과 전비 구축에 너무 많은 재정을 소모한데다가 그 루이 왕 말기에 왕과 왕비, 귀족들의 환락과 사치, 타락으로 구(舊)체제, 이른바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을 뒤집어엎는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혁명의 기운을 더욱 부추긴 것은 상류층으로의 부의 편중과 대중의 조세부담을 과중하게 만든 납세의 불평등이었다. 국민은 바다에 비유된다. 그 바다는 항상 평화롭지만은 않다. 평화로울 때는 ‘배를 띄우지만 거칠어지면 배를 뒤집어엎는다(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 콜베르가 ‘거위털론(論)’을 태연히 말할 때 프랑스 국민들은 이처럼 거친 바다로 돌변하기 시작했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고위 참모가 복지재원 염출을 위한 증세(增稅)를 말하면서 왜 하필이면 콜베르의 그 같은 거위털론을 인용해 국민들의 화를 잔뜩 돋우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일종의 ‘식자우환(識字憂患)’과 같은 것이 아닌가. 그는 차라리 거위털론을 모르는 게 약이 될 뻔 했다. 조조는 그가 탐내던 유비의 장자방 서서를 꼬여 내기 위해, 서서 어머니를 진중에 인질로 잡고, 달필이며 지식인인 서서 어머니의 필체를 흉내 내어 서서에게 어머니를 찾아오라는 거짓 편지를 써 보냈다. 효자인 서서가 그 편지를 보고 어머니를 찾아 왔을 때 서서 어머니는 망연히 자신이 글을 아는 것이 화근이라며 ‘식자우환’이라 탄식하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고사의 얘기다.

그 고위 참모는 한 술 더 떴다. ‘세목을 신설하거나 세율을 인상하지 않았으니 증세가 아니다’라고 했다. 과연 이 해괴한 말이 맞는 것인가. 그 궤변을 국민더러 받아들이라고? 학교 교실에서처럼 국민을 가르치려하는 것인가. ‘엄이도령(掩耳盜鈴)’이라는 글귀가 있다. 조용한 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 종을 훔치려던 도둑이 종이 너무 커 들고 나갈 수가 없으므로 꾀를 내어 그것을 망치로 깨 부셔가지고 들고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깨지는 소리가 너무나 컸으므로 남이 들으면 발각이 될까봐 자신의 귀를 막았다는 것이다. 제 귀를 막으면 남이 못 듣는가? 그와 비슷하게 자신이 증세가 아니라고 말하면 국민이 뭐라고 말하든 증세가 아닌 것인가. 왜 이런 식으로 팍팍한 살림 꾸려가기에 숨 가쁜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면서 안 해도 될 말, 해서는 안 될 말로 사안의 본질과 상관없는 사족을 달아 골을 지르는가.

국민의 분노가 터졌다. 그 화는 고스란히 그들이 모시는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급기야 대통령은 세제개편안으로 포장한 증세방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그 말이 떨어진 지 불과 하루 만에 수정안을 만들어내 공개했다. 정말 놀라운 재주다. 이건 아무래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대통령의 고심과는 달리 관료들의 편의주의적 발상과 습성이 발휘된 것 아닌가.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할 때는 원안을 만들어낼 때 결여한 국민여론을 수렴하는 절차와 설득력 있는 내용의 보완까지를 포함한 것이지 꼭 시간만을 재촉한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정부의 관련 기구 안에서 우물우물하다 덜컥 졸속으로 발표한 인상이 짙은 원안은 진지하고 심각하게 국민여론을 수렴하거나 이해를 구하는 절차, 전문가나 관련 각계의 의견을 듣고 지혜를 구하는 격식, 국민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진정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마땅한 보완조치 등을 생략했다. 그것이 화를 키우고 대통령을 곤혹스런 처지로 내몬 것이 아닌가.

국민 복지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국민은 학습했다. 사실 국민들은 입을 닫고 있었지만 세금이 잘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 복지 공약이 조정되지 않으면 결국 증세 얘기가 나오고 말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국민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다. 새누리당이 아니라 복지 공약의 재원이 더 많이 소요될 것으로 보였던 야당이 집권했더라면 사정은 더 할 것이라는 것도 역시 국민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부가 복지 재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것을 고소해하고 즐기려고만 한다면 야당은 양심이 검다. 국민은 그것도 안다. 이 기회에 야당이 국민으로부터 점수를 따려면 여당과 함께 고민하고 문제 해결을 도와주는 대승적 길을 선택하는 것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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