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종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조선 태조의 선왕들로부터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곳은 황실의 제1 성역인 셈이다. 종묘는 근, 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지 않은 수난을 겪어 왔었다. 그 수난은 해방 후 자유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침략 일제도 종묘제향만큼은 지내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정권을 잡은 초기부터 황실을 적대시해 종묘의 문을 굳게 채운 채 아예 폐쇄해 버렸다. 성역인 종묘의 주변이 차츰 변해갔다. 종묘의 바로 앞 종로3가는 6.25가 끝 난 뒤부터 사창가로 변하면서 우범지대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종묘 앞이 제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5.16으로부터 88올림픽 유치 때까지 27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지금도 주변이 많은 문제점은 안고 있으나 종묘는 이제 세계적으로 그 가치의 희소성이 인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원형이 그대로 확실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에 국왕이 친행하여 제를 지내는 것은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행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조선왕조의 성역인 종묘의 문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으로 고려 공민왕의 사당이 먼저 눈에 뜨인다.

보는 이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조선의 역대 왕들만 모신 곳 앞자리에 느닷없는 고려왕의 사당이 있다는 것은 기이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것도 공민왕 단 한 분이다.

공민왕은 고려 31대 왕으로 원(元)나라에 잡혀 가서 원나라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비(妃)로 삼아 원나라의 뜻에 따라 고려 충정왕이 폐위되자 임금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임금이 되자 몽골의 원격지배에 종지부를 찍고 항몽독립(抗蒙獨立)의 의지를 실현시킨 훌륭한 정치지도자였다.

몽골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그는 몽골식 복장인 호복과 변발 등 그들의 제도를 과감히 폐지시키고 백 년 간이나 설치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없애고 확실한 독립국가로 만들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지엄한 자신들의 성역에 왜 유일하게 고려 공민왕의 사당을 세웠을까. 그것은 이성계가 공민왕을 평소 존경했다는 뜻이 된다. 이성계는 한낱 시골 변방의 호족출신으로 공민왕이 장군으로 발탁 기용하지 않았으면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없었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고토회복 전투로 공을 세워 함경도지역 천호(千戶)에서 만호의 병마사가 되었고, 동녕부에서 고려를 넘보는 몽골군을 동북면원수에 임명된 이성계가 단번에 섬멸해 대승을 거두고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한다. 그는 공민왕이 아니었으면 본인이나 가문의 영달은 절대 얻을 수 없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공민왕 사당을 세운 것은 그와의 의리를 지키며 보답하기 위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침략 몽골에 항거하여 허약한 국력을 되살려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민왕의 업적을 존경하며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도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역사의 훌륭한 인물을 사표(師表)로 삼아서 사심을 버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려는 정치인들이 많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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