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 (사진제공: 살바토레 스칼라토 센트럴 롱 아일랜드 한국전쟁참전군인협회장)

6.25 배경과 주요 스토리

[천지일보=김성희 기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됐다. 그러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이 주둔함으로써 한반도는 분단됐다.

북한 김일성은 무력으로 남한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소련제 무기들을 북한에 반입했다. 또 중공에도 군사지원 약속을 받았다.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도 한국이 제외되자 북한은 남침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남침 준비를 완료한 북한군은 1950년 6월, 남침을 위해 공격무기들을 38도선으로 이동 배치했다.

6.25 전쟁 직전 한국군의 병력은 10만 5천여 명인데 반해 북한군은 19만 8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전투장비 면에서도 남한은 북한에 수나 성능면에서 뒤처졌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공격준비 사격과 함께 소련제 T-34형 전차를 앞세워 38도선 전역에 걸쳐 기습남침을 단행했다. 특히 북한군의 주 공격지역은 동두천과 포천방면이었다.

불시에 기습남침을 받은 한국은 열세한 병력과 빈약한 무기로 중무장한 북한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의정부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시각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미 지상군 선발대가 한국에 급파돼 오산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전선은 시시각각 남으로 밀렸지만 한국군과 유엔군은 음성, 진천, 단양, 대전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며 8월 초순경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무렵 부산에는 유엔군과 군수물자들이 속속 들어왔다.

6.25 전쟁 당시 전투력을 지원한 나라는 16개국이었고, 의료 지원부대를 파견한 나라는 5개국이었으며, 물자를 지원한 나라까지 합하면 무려 40여 개국에 이른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7만 5천여 명의 상륙병력과 261척의 함선을 동원해 인천상륙작전을 펼쳤고 작전개시 24시간 만에 인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상륙군 부대는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다음 날 수도 서울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인계했다. 38도선에 도달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 땅 깊숙이 진격해 원산에 이어 평양을 탈환했다. 10월 26일에는 초산을 탈환하며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그러나 10월 중순부터 중공군의 대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산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1950년 10월 25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안북도 운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이때부터 전쟁의 양상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전쟁으로 변했다.

중공군이 38도선을 넘어 서울로 진격해오자 정부에서는 서울 시민들에게 피난령을 내렸다. 이것이 1.4 후퇴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되찾았다.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공산군 측은 휴전을 제의해왔다.

1953년에 접어들어 휴전협상이 급진전되면서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마침내 휴전 협정이 체결됐다. 이로써 37개월 동안 치러왔던 6.25 전쟁은 휴전의 상태로 전투 행위만 끝낸 채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던 이 전쟁으로 인해 30만 명의 전력을 잃었다. 그리고 남한에서만 100만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희생됐으며, 10만 명에 달하는 전쟁고아와 30만 명에 이르는 전쟁미망인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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