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렬(82) 씨가 중학교 3학년 시절 6.25가 발발했다. 어느날 벽에 붙은 ‘군인 모집’ 광고를 보고있을 때 옆에서 말을 거는 헌병을 따라 나섰다. 그 길로 군에 입대해 전방에서 사투를 벌였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위생병 눈에 비친 6.25 전쟁- 6.25참전군인인 김성렬
배고픔 때문에 전방에 지원
수차례 포탄에 목숨 잃을뻔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중동부전선 선우고지(938고지)가 적군에 점령당하고 퇴각할 때가 제일 두려웠다. 포위당한 상태에서 적의 포가 떨어졌다.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아군 사상자가 많았다. 비가 오는데 발자국이 피로 물들었다.”

6.25참전군인인 김성렬(82) 씨가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전쟁을 만난 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 경기도 김포에 살던 그는 남침 소식에 인천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돌아온 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밭에 몸을 숨겼다. 김 씨가 살던 지역엔 북한군이 들이닥치진 않았지만, 이른바 적색분자가 활동하고 있었고 젊은이들을 이북으로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몰래 가져다주는 식량으로 버텼다.

눈앞에 펼쳐진 전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하늘엔 난생 처음 본 ‘쌕쌕이(전투기)’가 날아다녔다.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선 미군 함선의 함포가 불을 뿜었다. 포가 떨어지는 곳엔 집채만한 구덩이가 생겼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4~5일간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일주일 후 김포읍이 점령됐고, 9월 28일엔 서울 수복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에 있는 친척의 생사가 걱정됐다. 서울에 가보니 서대문구 홍제동에 사는 둘째 형은 무사했지만, 종로구 삼청동과 팔판동에 있던 큰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다. 집도 사람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전쟁통에 경황이 없던 그의 운명을 결정한 건 벽보 한 장이었다. 군대 모집 광고였다. 옆에서 말을 거는 헌병을 따라나선 게 군입대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3일 만에 도착한 부산엔 이미 2000여 명의 군입대자들이 모여 있었다. 훈련 기간은 1주일에 불과했다.

전방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건 배고픔 때문이었다. “찌그러진 양재기에 매일 미역국이 나왔다. 아주 꿀맛이었지만 양이 매우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방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고참들의 얘기는 매우 솔깃했다.

1951년 3월 부산에서 위생병 교육을 받은 뒤 배치된 전방 7사단. “좋아, 너희들은 파리 목숨과 같다. 목숨을 아끼면 안 된다. 이상” 자대배치 신고를 받은 부사단장의 훈시는 간단명료했다. 용기와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서 교차했다.

의무대대로 배치된 그는 숱한 위기를 만났다. “어느 날 부상자를 후송 헬기에 실어 보냈는데, 북한군이 갑작스럽게 포격을 해왔다. 화장실에 있다가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져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한번은 아군 없이 혼자 호에 고립되기도 했다. 적이 공격해오자 빨리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칼빈총을 메고 호에서 나왔다. 그러자 이번엔 북한 탱크가 쏜 포탄이 쾅쾅 터졌다. 포탄이 다 떨어졌는지, 쏘지 않는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했으나 꽹과리를 치고 내려오는 중공군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가장 큰 위기는 포탄이 바로 그 앞에서 터졌을 때였다. 저녁 11시쯤 장대비가 쏟아질 당시 포탄이 바위 앞에 정통으로 떨어졌다. 정수리와 얼굴 부위에 파편상을 입었다. 당시 19살이었던 그는 후송을 거부했다. 당시 생긴 흉터는 지금도 전쟁의 상흔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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