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인명 살상과 파괴가 본질인 전쟁은 참혹하다. 세계 2차대전 바로 뒤 그 여진(餘震)으로서 일어난 한국전쟁의 참혹함 역시 인류 역사에서 결코 앞 순위를 놓치지 않는다. 수백만 명이 죽고 다쳤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되어 3년 1개월여의 열전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의 조인으로 겨우 멎었다. 따라서 2013년으로 정전된 지 60주년이다.

그동안 아슬아슬한 평화가 이어져왔다. 하지만 전쟁 당사자 피아간에 발을 뻗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진정한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선을 중심으로 밀집된 중무장 병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피차 비극의 뇌관을 또 한 번 격발시킬 수도 있는 불신(不信)마저 깊다. 더구나 북은 평화를 말하면서 민생보다는 군비, 정상적인 국가 운영보다는 선군(先軍) 정치를 외치면서 핵을 개발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힘이 없으면 먹힌다.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뼈아픈 교훈 아닌가. 60년 동안 정전 체제가 지속되면서 위기도 많았고 아슬아슬했지만 대저 평화는 길었다. 거기에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가 인구비례에서 우위를 점유하게 되어 전쟁의 참혹함은 점차 잊혀져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절박한 것은 ‘전쟁을 잊으면 위기가 온다’, 바로 ‘망전필위(忘戰必危)’의 교훈을 새삼 두루 환기시키는 일이다.

적의 도발 의지를 꺾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월등한 힘을 가져야 한다. 도발할 엄두조차 낼 수 없게 하는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이 엄연한 사실에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그 같은 완벽한 안보 역량의 토대 위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그들은 한국군에는 없는 탱크, 전투기, 잘 훈련되고 수적으로 월등한 정예 병력으로 쓰나미(Tsunami)처럼 기습했다. 개전 2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8월 초에는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낙동강 전투에 인민군은 1개 전차사단, 9개 보병사단을 투입하고 3개 보병사단을 더 낙동강 전선으로 향하게 했다. 전 국토가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순간의 일로 보여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완강한 용전분투와 미 B29폭격기들의 초토화 폭격 등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결정적으로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사령관의 결단에 의한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공격의 예봉이 꺾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병력은 지리멸렬이 되어 쫓기고 흩어졌다.

김일성의 남침은 철저히 준비된 한국을 향한 기습공격이었으며 기민한 기회 포착이었다. 남쪽은 군비가 허술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남한에서의 인민봉기를 기대했지만 그 주역이 돼야 할 남로당이 붕괴돼 버린 상황이어서 무력 남침에 의한 직접 공격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북한 내부에서는 김일성이 권력의 헤게머니(Hegemony)을 쥐기 위해서 권력 투쟁 중이었던 남로당의 박헌영과 연안파의 김두봉을 쳐내야만 했는데 전쟁이 그 구실이 돼줄 수 있었다. 거기에 절호의 기회인 것은 남침 전해인 1949년 6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고 10월에는 마오쩌뚱(毛澤東)에 의해 중국 대륙이 공산화됐다. 정말 그가 군침을 흘리게 된 것은 남침의 해였던 1950년 1월, 얼빠진 미 국무장관 애치슨(Acheson, D.G.)이 발표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성명이다. 이 한마디가 남침을 준비해온 김일성을 얼마나 고무시켰으며 얼마나 큰 불행을 불렀는가.

이 같은 대내와 여건을 예의 주시한 김일성은 드디어 소련 수상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뚱을 달달 볶고 설득해 남침 승인을 받아내게 됐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이론이 없을 만큼 문헌으로 이미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일이다.

한국전쟁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전격적인 참전으로 길어졌으며 그만큼 전쟁의 참화도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 군대가 쫓기고 흩어지게 되자 당시 중공 수상 주언라이(周恩來)는 1950년 8월 20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중공은 조선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띄웠다. 그 후 9월 30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자 그는 다시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고 했으며 10월 3일에는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에게 ‘한국군만이 38선을 넘는 경우는 파병을 않겠지만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는 파병할 것’이라며 이를 미국에 통보해줄 것을 요청했다. 맥아더는 이에 대해 긴가민가하면서도 공갈협박으로 받아들이는 판단착오를 저질렀다. 중공 정부는 드디어 11월 4일 중국인민해방군의 참전을 ‘항미원조(抗美援助)’라는 명목으로 공식 발표하게 된다. 이때 이미 참전 미군의 숫자 만큼인 30만 군대를 꽁꽁 언 압록강을 야밤에 건너게 해 평안북도 산악지대에 숨겨 놓았었다. 마오쩌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도 러시아어 통역 장교로 참전 해방군의 하나였다. 그는 미군 폭격으로 진중에서 죽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할 시각 진전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올해가 그 정전협정 조인 60주년이 되는 것이다.

이 정전 60주년을 기념하는 방식에서 남과 북은 너무나 다르다. 북은 전승기념일이라면서 대대적인 무력시위와 열병을 벌였다. 핵보유국임을 과시하려는 듯 방사능 표시 마크를 단 병력도 트럭에 실어 선보였다. 중국은 국가 부주석 리위안차오(李源潮)와 참전노병 대표단, 인민해방군 문예대표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리위안차오를 깍듯이 배려하고 리위안차오가 김정은의 잔치에 채면을 세워주는 것과는 달리 정작 중국 국내는 차분했다. 그 리위안차오도 김정은과의 독대에서는 비핵화를 강력히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쪽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현의 한 방안으로 ‘DMZ를 평화지대로 만들자’는 주장을 거듭 강조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정전기념일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는 등 한국 미국 모두 이날을 기념해 전향적인 평화 체제 구축을 화두로 삼았다. 한국에 초청되어 온 참전국 용사들은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킨 한국의 발전에 놀라고 보람을 느낀다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토로한다. 북에 간 손님들은 그들의 무력시위에 무엇을 느꼈을 것인가. 어느 쪽에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인가는 물어볼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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