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시골 풍경은 어느 지방이나 비슷하지만, 한한국이 나고 자란 전남 화순군 청풍면 어리는 어찌나 산골인지 시골도 그런 시골이 없었다. 그만큼 낙후되고 가난한 동네였다. 그곳에서도 한씨와 천씨의 집성촌 가운데 제일 후미진 모퉁이에 한한국이 살았다.

작은형, 나 산돌에 붓글씨 쓰러 간다.”

산돌에는 어른이 누워도 좋을 만큼 널찍한 돌들이 놓여 있어, 한한국은 툭하면 그곳에 가서 놀기도 하고 책을 보거나 붓글씨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평상처럼 평평해서 가마니때기나 밀대방석을 펼쳐놓으면 아늑한 쉼터가 되었다. 그날도 한한국은 산돌에 가서 붓글씨 연습을 하려고 책보를 풀었다.

한국아, 이거이 요새 새로 나온 필통이랑께. 너만 사주는 것잉께 형 누나에게 자랑하지 말거라이.”

지난 장날에 아버지가 넌지시 선물해 주신 커다란 필통이 책보자기 맨 위에 있었다. 연두색으로 속이 환히 비치는 플라스틱 필통이었는데 아마도 막내아들이라서 이런 귀한 필통을 사주신 것 같았다. 한국은 필통에서 붓을 꺼내어 종이를 펼치고 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산돌 위에 엎드려 한창 붓글씨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발바닥을 지나고 장딴지를 거쳐 허벅지로 무엇인가 간질간질 기어오르는 촉감이 느껴졌다.

에잉? 이게 뭐야?”

언젠가 이곳에서 낮잠을 자다가 한 뼘이나 되는 지네가 잠방이 속으로 기어들어 까무러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글쎄 생전 보지 못한 눈부시게 흰 백사(白蛇)가 다리 위로 올라오는 게 아닌가?

워메, 이게 뭐다냐? 백사 아녀!”

한한국은 너무 놀랍고 신기해서 엉겁결에 50~60쯤 돼 보이는 백사의 목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평소에 뱀이라면 멀리서도 침을 뱉으며 도망칠 만큼 싫어했는데 이번에는 용감하게 백사를 잡았던 것이다.

근데 백사는 영물이라 죽이면 안 된다던디…….”

그런 위급한 순간에도 이 말이 떠올라 한한국은 백사를 플라스틱 필통에 집어넣었다. 백사는 땅꾼에게 잡힌 뱀처럼 순순히 필통 안에 담겨 똬리 틀고 엎드렸다. 그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 필통 뚜껑을 눌러놓고 집으로 달려갔다. 어린 소견에도 이 희귀한 백사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형, 나 뱀 잡았어. 아주 하얀 뱀이야!”

뭐시어? 뱀을 잡았어? 물리지는 않고?”

, 어서 가봐. 산돌 위에 있으니까.”

싫어, ! 사람 눈에도 잘 안 띄는 백사를 네가 어케 잡았다냐.”

가기 싫다는 작은형을 억지로 데리고 가보니 그 사이에 백사는 필통 뚜껑을 열고 달아나 버렸다.

분명히 잡아서 여기에 넣었는데…….”

한국아, 진짜야? 거짓말 아니지? 근데 이상하구나. 어디로 갔지?”

자신을 의심하면서 묻는 작은형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억울한 마음에 저녁 때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께 백사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

옛날에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우리 집에 백사가 산다고 하셨다. 그건 우리 집의 수호신이라 해코지하면 안 된다고 했어. 그렁께 그냥 만지기만 한 거지?”

, 필통에 넣었는데 그대로 달아났어요.”

됐구나. 만약 백사를 해코지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어머니의 안심하시는 표정에 그제야 가슴이 벌렁대는 흥분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뱀을 잡았을 때의 촉감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훗날 어른이 되어 그가 1한글로 붓글씨를 쓰기 위해 매끄러운 붓대를 손에 쥘 때마다, 신기하게도 바로 어린 시절에 백사를 만지던 촉감을 느끼곤 했다. 붓글씨를 쓰노라면 붓털과 한지가 사각사각 스칠 때마다 묘한 희열을 느끼곤 하는데, 그것이 백사를 만지던 순간에 느꼈던 야릇한 쾌감과 몹시 닮아 있었던 것이다.

한한국이은집 공저

▲ ●작품명: DOKDO(독도) ●작품크기: 가로 2m80㎝ × 세로:2m ●제작기간: 2005~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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