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人 평화를 말하다-달라이 라마[2]

▲ 티베트 정신적 지도자 제14대 달라이 라마. (사진출처: 뉴시스)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15세라는 어린나이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화평해방’ 정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에도 중국 정부의 간섭은 계속되고 티베트 문화와 종교를 말살하려는 정책은 노골화돼 간다.

아무 기댈 곳 없는 달라이 라마는 1956년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초청으로 그는 인도를 방문하게 된다. 이때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정신을 마음 깊이 새기는 체험을 하게 된다.

간디가 화장된 ‘라지가트’를 찾은 달라이 라마. “마하트마 간디가 살아 계셨다면…. 그분은 티베트인들의 자유를 위한 비폭력 저항을 지지했을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어떤 어려움이 가로막더라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비폭력 저항에 대한 강한 신념을 마음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을 떠난 달라이 라마,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다
1959년 초 티베트인들의 저항이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티베트인들은 중국 정부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중국군에 의해 12만여 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학살되고, 6000여 개의 불교사원이 파괴되자 달라이 라마는 국제적 지원과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약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동북부의 히말라야산맥 기슭인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운다. 그는 망명정부를 정비하기 위해 1960년 티베트 행정부를 개혁하고, 그 밖의 정부기관도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작업을 추진한다. 1963년 티베트 헌법을 제정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운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 티베트의 독립과 자치권을 호소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 그는 1960년대 말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1967년 처음으로 인도를 떠나 일본과 태국을 여행하게 된 달라이라마는 1973년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1979년 미국 방문 등을 하게 된다. 세계 주요 나라의 정상과 저명인사들을 만나 비폭력 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했다.

◆티베트의 비폭력 평화정신 세계인을 감동시키다
달라이 라마는 한 나라의 종교 지도자를 넘어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의 교류와 화합, 상호이해를 증진하는 데 힘쓴다. 외국의 많은 종교인들도 그를 만나기를 원했다. 그는 그중에 요한 바오로 2세, 테레사 수녀, 스페인의 가톨릭 수사, 캔터버리 대주교인 로버트 런시 박사 등을 만나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 시기 티베트 내부의 청년들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는 그때마다 또다시 비폭력을 강조했다. “우리가 폭력을 행사하면 국제사회도 티베트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이유는 우리의 비폭력 노선 때문이다.”

1960~70대 활동했던 티베트의 무장 게릴라 조직인 캄바의 대(對) 중국 무력투쟁 노선을 반대해 이를 해산시키는 등 세계평화를 위한 비폭력주의를 고수했다. 나라 밖에서 달라이 라마의 지도력은 빛났고 티베트인들의 신앙심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1987년 9월 21일 미국 의사당에서 중국 정부에 ‘5개 평화안’을 제안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10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우리 민족의 결의와 공약과 정신적 가치 그리고 비폭력 관행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이 상은 그와 같은 신념과 인내를 깊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짧은 소감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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