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락보전(極樂寶殿) 앞에 ‘양반꽃’이라고 불리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손님 맞는 관세음보살상
목과 팔에 화려한 장식해

고요하고 한적한 산 속 절 안
스님 불경 외는 소리만 가득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서울이 장마로 얼룩져 있다.새벽까지 내린 장맛비로 인해 도심은 젖어 있다. 후텁지근한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의 불쾌지수도 높아졌다. 이럴 때는 도심을 벗어나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며 수박 한 입을 베어 먹는 ‘휴식’이 필요하다. 장마가 잠깐 멈춘 틈을 타 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에 있는 회룡사(回龍寺)를 찾았다.

‘양반꽃’이라고 불리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그 뒤로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북한산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오랜 전통이 있는 사찰건물과 그 옆에 피어 있는 능소화는 한 폭의 그림이 됐다.

경내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 바로 옆에는 왼손에 보병(寶甁)을 든 관세음보살 입상이 목과 팔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손님을 맞는다.

◆겉은 소박, 안은 화려한 대웅전
관세음보살상 뒤로 대웅전이 보인다. 다른 사찰 대웅전보다 크기가 아담하고 겉모습이 소박하다. 정면에 있는 긴 수염을 가진 두 마리의 용이 눈에 띈다. 반면 내부는 장엄하면서도 화려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대제시보살(大勢至菩薩), 관음보살상 등이 있는데 불단이 석탑으로 돼있어 특이했다.

이날 30℃가 넘는 날씨에도 대웅전 안에선 불자들이 연신허리를 굽히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불단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8호인 신중도(神衆圖)가 있다.

회룡사 신중도는 가로 2m 19.5㎝, 세로 1m 76㎝으로 꽤 큰 그림이다. 그림 속 신중(불교의 수호신·호법신)들의 옷은 주로 분홍색에 가까운 옅은 붉은 색인데, 군청과 녹색이 가미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 서울 근교의 불화양식으로 당시 특징을 잘 살려내고있다.

◆장엄한 극락보전… 불경 외는 소리 들려
불경을 외는 소리가 들려 그 출처를 찾으니 극락보전이었다. 회룡사의 극락보전은 대웅전보다 크고 장엄하다. 안에는 스님 네 명이 절을 하며 불경을 외고 있다. 삼성각과 나란히 있는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96년 완공된 이 건물 내부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의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돼 있다. 불상 뒤로 무위사의 아미타삼존벽화를 모사(模寫)한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신라 선덕여왕 6년(632) 의상(義湘)대사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지닌 오층석탑(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86호)이 있다. 약 3.3m의 이 석탑의 지대석(址臺石)과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각 면석에는 직사각형으로 나눈 칸에 모두 눈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6.25 전쟁 때 심하게 손상돼 1979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일부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5세기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왕실의 발원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조선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대웅전에서 50m 정도 가면 옥수수 밭을 등지고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약사전이 나온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닳은 건물, 전통사찰의 멋 뽐내
경내를 한 바퀴 돌고 가려는 찰나에 저 멀리서 들리는 불경 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대웅전에서 조금 떨어진 약사전에서 나는 소리였다. 작은 길을 50m 정도 가면 옥수수 밭을 등지고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약사전이 나온다.

1955년에 건립된 약사전은 겉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은 울퉁불퉁하게 갈라져 있으며, 나무로 된 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닳아 있다. 또 단청도 모두 벗겨져 어떤 그림이 그러져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불자의 손때가 전통사찰의 멋을 더했다. 사실 이전 모든 건물은 새로 지어져 매력이 덜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이 내부에는 하얀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회룡사에 얽힌 전설 두 가지
회룡사에 얽혀 전해지는 이야기는 두 가지다. 첫째 설화는 ‘왕자의 난’ 후 태조와 태종의 사이가 멀어졌을 때 함흥에 가 있던 태조 이성계가 1403년 환궁한 뒤 이 절에 있던 무학대사를 찾았다. 이에 기뻐한 무학대사가 회룡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설화는 창업 전태조가 근처 석굴암에서, 무학대사는 무학굴에서 3년 동안 머물며 각각 기도했다. 그 뒤 태조는 동북면병마사라는 직책을 맡고 요동으로 출전했고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태조가 무학대사를 찾아와 절의 이름을 회룡이라 지었다는 이야기다. 또 원래 법성사라는 이름이었다가 회룡사로 고쳤다는 등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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