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땅에 묻힐 지석의 내용이 공개됐다. 지석에는 김 전 대통령의 주요업적과 가족사항 등의 내용을 새겨 넣었다.

다음은 지석 문안이다.

公(공)의 성은 金氏(김 씨), 본관은 金海(김해), 휘는 大中(대중), 호는 後廣(후광)이다.

1924년 1월 6일(양력)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암서당과 하의도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대중의 영특함을 살리기 위해 목포로 이사했고, 대중은 전학 간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9년 5년제 목포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목포에 있는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유망한 청년실업가로 명망이 높았다. 1945년 차용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50년 9월 목포형무소에 갇혔다가 인민군들의 무차별 학살극에서 극적으로 탈출, 살아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부산 정치파동을 현지에서 겪으며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장면박사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 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선거에서 거푸 낙선을 하다가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의 꿈이 무산되었다.

1962년 5월 정치적 동지인 이희호와 결혼했다. 1963년 11월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요한 낙선 공작에도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후보로 뽑혔으나 이듬 해 치른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 중 승용차가 대형트럭에 받혔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나 망명길에 올랐다.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해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국에 끌려와 오랜 기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 세력에 잡혀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국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구명 운동으로 감형되어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85년 망명 생활 2년 만에 귀국을 강행, 198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제1야당 총재가 되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패배했다. 그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설립하였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그해 12월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2월 퇴임하여 서울 동교동 사저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었다. 퇴임한 국가 원수로는 처음 국장으로 모셔졌고,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히셨다. 자손으로는 아들 홍일, 홍업, 홍걸이 있고, 손자와 손녀는 지영, 정화, 화영, 종대, 종민, 종화, 종석이 있다. 수많은 학위를 받았고, 옥중 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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