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인도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돌변해 인도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했고, 영국은 맨손으로 독립을 외친 인도인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1930년대에는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영국이 ‘소금법’을 만들어 인도에 소금을 비싼 가격에 팔아치웠다.

간디는 하루 60㎞씩 걸어가 직접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소금행진을 벌였다. 많은 인도인들은 간디의 운동에 동참했고, 영국은 간디를 감옥에 가뒀다. 간디는 단식을 시작했고, 간디의 건강상태를 다룬 언론보도 때문에 영국은 마지못해 석방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과 인도인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는 행동하는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진리를 향한 갈급함으로 가득했고, 실천에 옮김으로 힘이 실렸다.

“내가 절대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상대적 진리를 굳게 잡는 수밖에 없다. 이 상대적 진리가 그때까지는 나의 등대요, 나의 작은 방패요, 나의 큰 방패다.”

간디는 참 진리를 궁극적인 ‘신’ 즉 하나님이라 여겼다. 또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신’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봤다. 이 과정에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울러 실천에 필요한 요건을 ‘자기정화’로 봤다.

“마음이 정결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신(진리)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정화’라는 ‘삶의 모든 행동의’ 정화를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정화는 매우 감화력이 높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정화는 필연적으로 이웃들의 정화를 선도한다. 완전한 정결에 이르려면 생각과 말과 그리고 행동에서 정욕을 완전히 초월해야 하고, 사랑과 미움, 애착과 염증의 상반된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

이 때문에 그는 금식을 중요시했다. 음식을 절제하며 이뤄지는 기도에 초점을 맞췄다. 몸을 절제함으로 하나님과 더욱 긴밀한 교제를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 간디는 구원을 위해서 갖춰야 할 덕목으로 ‘무소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과 같이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소유나 평등관은 심정의 변화, 태도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청천백일같이 내 마음에 명확해졌다.”

자아정화를 통해 주변을 정화하려 했던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운동은 1947년 8월 15일 광복으로 결실을 맺었다. 200년 동안 지속된 영국 통치에서 벗어난 것.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반쪽짜리 광복이었다. 영국은 인도인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로 나눠 별도로 협상을 진행했고, 이 때문에 결국 인도는 둘로 분리된 독립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힌두교인 인도와 이슬람교인 파키스탄이다.

간디는 계속되는 종교분쟁을 없애고자 종교 간 화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간디는 종교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간디의 행동이 이슬람교를 두둔한다고 오해한 열성적인 힌두교도의 총에 맞아 1948년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