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0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준공 및 개관식이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기념관 지하 1층에 전시된 안 의사 좌상과 안 의사가 단지(斷指)할 때 나온 피로 쓴 것으로 알려진 대형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전시관 입구로 이동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로 5가 남산도서관 위에 자리한 기념관은 부지 5772㎡, 건축면적 1185㎡, 연건평 3756㎡이며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에 단지동맹에 참여한 12인을 상징한 12개의 기둥으로 건물을 형상화했다. 천지일보 DB.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권고히 하여 한청일 삼국이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팔천만 이상의 국민이 서로 화합하여 점차개화의 성으로 진보하고 나아가서는 구주와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에 진력하면 시민은 안도하여 비로소 선진의 조칙에 부응할 것으로 생각한다.”

안중근은 한‧청‧일을 운명공동체로 인식하고, 서로 상생함으로써 동양에 평화를 가져다주길 간절히 바랐다. 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란 강한 신념이 천주교를 믿는 그의 신앙에서 나왔다면, 동양의 평화를 위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안중근은 우리 민족이 외세에 짓밟히는 현실을 직시했고, 약육강식에 사로잡힌 외교관계를 피부로 느꼈다. 일례로 안중근의 부친이 치료를 위해 청나라 의사를 찾아갔다가 매를 맞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안 안중근은 자조지종을 물어보려 친구와 함께 청나라 의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도리어 칼로 위협을 당했다. 안중근의 친구가 하늘을 향해 총을 발사해, 사태가 겨우 진정됐을 정도다.

안중근은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고 법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에는 외국인을 처벌할 재판권이 없었다. 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조용히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반면 적반하장으로 청나라 의사는 안중근의 친구를 오히려 범인으로 몰았다. 그리고 청국에 호소해 고발조치했다.

이에 조선 외군에서는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해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다행히 그 일대에 안중근 의사 일가의 명성이 높아 문제가 확산되지 않았지만 안중근에게 이 일은 큰 충격이었다. 청나라 사람과 청나라 정부가 우리 땅에 들어와 침략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됐다. 아울러 국민의 도리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도 갖게 됐다.

“나라란 몇 개 대관들의 나라가 아니라 당당한 이천만 민족의 나라인데, 만일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행하지 아니 하고서 어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지금은 민족세계인데, 어째서 홀로 한국민족만이 남의 밥이 되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소.”

안중근은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원했고, 이를 위해선 국민의 계몽이 바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백성을 위해 교육계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처음부터 일본을 침략적 외세로 보진 않았다. 대한제국의 문명개화를 도와주고 독립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상생할 수 있다고 여겼다. 조선을 침략해온 청나라에 대항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일의정서를 위반하고 대한제국을 침탈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거짓으로 인의를 칭하고 내면으로는 세와 권을 뺏고자한다”며 “16세기에 장성한 민족주의가 20세기의 신천지에 광휘 활약하여 우주를 진혹하며 동서로 충돌하게 한다”고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에 직격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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