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가 평양 안병찬 변호사를 면회하고 동포에게 전한 것으로 1910. 3. 25 대한매일신보 게재. 천지일보 DB.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우리 민족을 침략했기 때문이 아니다. 동양의 평화를 깨트리고 해치는 자이기 때문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은 중국하얼빈 역에서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독립투사이면서 독실한 천주교인이기도 했던 그가 원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평화’였다.

그는 망명생활과 의병전쟁 중에서도 매일 아침 하느님을 향해 기도했고, 거사 당일에도 기도 후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초기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천주교는 당시 일제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고, 독립운동도 금지했다. 이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살인’이라고 평가했다.

훗날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안중근이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라는 점이 부각되며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이 재조명됐다. 안중근이 대한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우리나라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학자들은 안중근이 천주교 교리에 충실했으며 정의와 평화를 위해 희생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은 평화를 바라면서도 부패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곧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흡사 유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군자의 면모이기도 하다. 안중근의 ‘유고집’에 따르면 의협심 때문에 안 의사는 당시 교구에서 사역하던 홍 신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 사이 나는 홍 신부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홍 신부는 언제나 교인들을 억압하려는 폐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러 교인들과 상의했다. “거룩한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마땅히 민 주교에 청원하고, 만일 민 주교가 들어주지 않으면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품의해서라도 기어이 이러한 폐습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모두 이에 따르기로 했다. 홍 신부가 말을 듣고 크게 성이 나서 나를 무수히 치고 때려 나도 분하기는 했으나, 그 욕됨을 참아냈다.’

그는 부패에 대해 지적을 하면서도 신자로서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홍 신부가 때릴 때 맞으며 참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홍 신부는 안중근이 여순감옥에 있을 때 용서를 구해왔고, 안중근이 받아들여 화해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서의 일화도 있다. 청년회 임시사찰을 맡고 있었던 그는 규칙을 위반한 회원을 제지하다가 뺨을 맞았다. 이때도 안중근은 “오늘날의 사회는 여러 사람의 힘을 모으는 것으로 주장을 삼는 것인데 이같이 다투면 웃음거리가 되니 화해하자”고 말하며 평화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병 전쟁 중에는 붙잡은 적을 풀어주며 “우리마저 야만의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 등 그의 행동에는 ‘평화’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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