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하빈 작가

▲ 류하빈

TV 화면엔 연일 연예인들의 이혼 소식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고, 때리는 남편과 맞는 아내, 자살한 청소년들의 뉴스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혼기에 다다른 막내 딸 아이는 결혼하기가 무섭단다. 이런 일들은 비단 우리 아이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 중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아내와 자식에게 군림하는 가장의 모습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우리 아버지는 건장한 체격에 강한 카리스마로 청중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였다.

난 어린 시절 아버지를 곧잘 ‘폭군 네로 황제’에 비유했었다. 한 번 고함을 지르면 산천초목이 떨 정도로 무섭다. 어머니나 자식들은 입도 뻥끗 못하고 낮은 자세로 몸을 도사리며 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집 밖에만 나가면 의리의 사나이다. ‘술값은 내가 낸다’는 슬로건 아래 모든 술값은 자진해서 지불했다. 그 외상 술값으로 인해,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소 한 마리가 팔려 나갔다.

또 ‘00는 날아가는 까마귀에게도 술을 먹인다’라는 말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녔다.

호탕, 호방, 남성미의 극치를 이룬 아버지는 돈만 있으면 최고의 남자다. 그러나 문제는 돈 쓰는 건 멋지게 쓰나, 한 푼도 벌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촌에 살면서 농사일은 나 몰라라 한다. 머슴에게 적당히 지시해 놓고는, 면 소재지로 출근하신다. 술집에서 시조를 읊조리며, 세상을 논하다, 저녁이 되면 고주망태가 돼서 귀가하는데, 이 모습 또한 가관이다.

동네 어귀서부터 쇳소리 섞인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고, 집이 가까워지면 내 이름과 동생 이름을 번갈아 부르며,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온 듯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출현을 알린다. 아마 뛰어나와 환영하길 바랐을 것이다.

못마땅한 엄마는 고개 내리 깔고, 작은 소리로 구시렁구시렁 불만을 얘기한다. 그러면 순식간에 우리 집은 쑥대밭이 돼 버린다.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밥상을 뒤엎고,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집어 던진다.

이런 일은 장날에 더욱 심하다. 난 장날 오후만 되면 두렵고 불안하다.

이렇게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드시는 날이 아마 365일 중 300날은 될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주 태백’이라는 별명 하나를 더 추가했다.

난 자라면서 아버지 없는 친구가 부러웠다. 기죽은 엄마가 불쌍했고, 아버지께서 외출해 돌아오지 않는 날이 엄마와 내가 해방되는 날이다.

언니와 오빠는 일찍부터 외지에 공부하러 나갔기에 내가 이런 모습을 가장 많이 보고 자란 것 같다. 후에 들으니 내가 시집가고 난 뒤는 동생이 고생했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친정에 집수리를 한다 해서 갔었는데, 아버지 빈자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다. 큰소리로 맞아 줄 아버지 모습이 보이지 않아, 집안은 온통 적막했다.

‘니 아버지 없이 3년만 살아 보는 게 소원이다’ 하신 엄마는 기진한 모습이다. “아버지 안 계시니 편치 않냐?”는 물음에 엄마는 “꼭 날개 부러진 새 같다”라고 하셨다. 내 물건을 챙기려 다락방에 올라갔다가 아버지의 자식 사랑 앞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4남매의 이름을 곱게 써서 개인별로 상장, 졸업장, 통지표 등을 케이스에 담아서 보관해 두셨다.

내 어린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물건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미워했던 그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너무 늦게 자상한 아버지의 정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 분은 계시지 않았다.

또 고향 땅을 매매하러 등기부 열람차 면사무소에 들렀는데, 거기서 난 통 큰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의 함자를 대니, 면 직원 몇 명이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자신의 땅을 서슴없이 양보하여 국가사업에 협조했다는 것이다.

그 때 난 알았다. 우리 마당이 왜 그렇게 좁아졌는지……. 울타리 안에 심었던 감나무가 왜 울타리 밖으로 나갔는가를……. 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골목길을 넓힌다면 우리 마당을 내주고, 농로를 넓힐 때는 우리 논밭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일부분만 보고 무서워하고 미워했던 일이 부끄럽다.

지금도 그분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고, 끼친 음덕이 우리 자식들에게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불안하고 가슴 졸였던 과거에서 벗어나, 어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헤아려 본다.

첫째로 외모이다. 아버지의 큰 키를 닮아 우리 형제 모두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늘씬한 체형으로 살아 왔으며, 내 자식에게도 큰 키를 물려 줄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강한 카리스마와 추진력으로, 어딜 가나 우리 형제들은 리더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또 그림, 공예 등의 소질들도 후손들이 물려받았다.

아버지 가신 지 20년이 넘은 오늘 그 분을 그리워한다. 성현의 말씀에 자욕양이 친부대(子欲養而 親不待)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진작에 깨달았으면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했을 텐데……. 아내와 자식들이 멀찍이 서서 피하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일본에서 공부하시고 사업도 하신 분이라 일본어에 능통하셨다. 그래서 일본어 편지의 대필을 도맡아 하셨다. 그런데 난 ‘왜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가 된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신학기엔 책갑을 입혀 주셨고, 방학 숙제의 만들기 1점은 아버지가 감당하셨다. 아버지가 만든 멋진 공예품을 보고 감탄하시던 선생님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늘따라 촉촉이 봄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가 대지를 키우듯 우리 형제들도 아버지의 따뜻한 이불 밑에서 자라왔음을 오늘에야 확실히 알겠다. 이것을 깨닫느라 환갑을 넘겼다. 이제 와서 갚을 길 없는 무능함이 답답할 뿐이다. 우리 아이에게 봄비가 되어 내 무능을 달래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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