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일본 정부가 올해 국방정책의 기본 방침을 담은 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하는 똑같은 주장을 9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일본의 무력 침범으로 국권을 유린당한 36년간은 일제 치하에 있었지만, 독도는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신라 지증왕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에 대해 정치적 접근 이외의 관리로 1999년 12월에 천연기념물(제336호)로 지정하고 독도를 천연보호구역으로 관리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로 우기면서 어떻게 하든지 독도에 대해 국제적 분규를 야기시키려 안달하는 현실에서, 국민에게 ‘대한민국 섬’이라고 말할 때에 가장 독도를 먼저 떠올릴 만큼 독도는 국가의 표상이 되고 있다. 그런 시기에 국내 조각가가 광복절을 기념해 독도에 ‘로봇 태권V’ 조형물을 세우는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누리꾼들이 일본 ‘마징가Z’의 표절작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조각가가 우리땅 독도에 대해 안정적인 평화 선언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착상한 것이지만 독도에 조각을 임의로 세우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독도에는 ‘한국영토’ 비석 등 12기의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기념비가 독도조난어민위령비(獨島遭難漁民慰靈碑)이다. 이 비석은 6.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8일 조재천 경상북도지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 선착장 근처 몽돌해변 절벽 아래에 세워졌다. 당시 비석의 비문에는 ‘독도 어민들이 숨진 지 2주년을 맞아 조난어민 제위의 명복을 빈다.’라는 내용과 함께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고려해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재천명하기 위해 건립한다.’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 이 비석이 사라졌는데, 그 경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일설에 의하면 6·25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일본인이 독도에 대해 침탈 행위가 잦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1952년 8월에 불법으로 독도에 상륙해,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독도에 세우는 등 계속해서 불법 행위를 저질렀고, 이를 발견한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에서 그 표목을 제거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파괴됐다고도 하고, 다른 이야기는 태풍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5년 8월 15일 경상북도가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복원했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독도조난어민위령비’라 하니까 그 문장 의미만 해석하면 독도에서 조난당한 어민을 위한 위령비로 생각된다. 그러나 내용의 실상을 알아보면 커다란 잘못과 오해가 숨겨져 있는데, 미군정 시절과 6.25전쟁 중에 대한민국 정부의 기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비극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1945년 일본이 패전을 하고 한국이 광복을 맞았다. 이때에는 아직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이므로 미군정에 의해 국내의 정치·경제·사회 문제들이 정리되던 때였다.

독도는 지리적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과 북한에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이 소련을 봉쇄할 수 있는 전략적 위력의 실험이 가능한 최고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 9. 16)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그 이후에 미 공군은 독도 지역에 대해 1948년 6월과 1952년 7월 등 두 차례의 폭격이 있었다.

제1차 폭격은 지역 주민들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1948년 6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발생됐다. 미국 극동공군사령부의 B-29 폭격기 9대가 4차례에 걸쳐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 사격을 실시하는 등 폭격 훈련을 하였다. 이로 인해 독도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울릉도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어선 20여 척이 파괴됐다고 확인됐으나,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어부는 “30여 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므로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튿날 독도에 조업을 나간 어선에 의해 어민들의 사망이 알려졌고, 6월 11일에야 언론에 보도됐는데, 독도에 대한 폭격은 ‘야만행위’이며 ‘진상조사와 책임자 공개 처단’ 등을 요구했다.

미군정 아래에서 한국인들의 존엄과 생명이 무참히 짓밟혔다는 국민여론을 업고서 국회에서 곧바로 독도폭격사건이 논의됐지만 당시 사건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의 상황이라는 주장이 나와, 결국 유야무야로 끝을 맺었다. 그렇지만 독도폭격사건은 당시 사상·이념적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한국인들을 전례 없이 양쪽을 모두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6.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5일 독도에서 제2차 폭격이 일어났다. 그날 오전 11시경 미공군 폭격기가 독도를 향해 폭탄을 투하했지만 다행히 한국 어민 23명은 무사했다. 내 나라 영토에서 평화롭게 조업하던 어민들이 우방국의 폭격에 의해 많은 어민이 희생당했고, 그 비극의 현장이 바로 독도인데, 정말 국민의 피와 애국심으로 지켜진 땅이다. 그렇지만 미군정 하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실은 날이 갈수록 빛바래져가고, 다만 사망한 어민들의 혼을 달래기 위하여 세워진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그날의 참상에 조용히 항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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