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에 서거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궤적과 함께 해 온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다양한 수식어 중 국민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인동초’ ‘준비된 대통령’ ‘한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 등이다.

김 전 대통령은 섬 전체 주민이 소작농이던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 북초교와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해운회사와 목포일보를 경영하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를 참지 못하고 민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이 정계와의 인연이 됐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삶은 말 그대로 ‘인동초’였다. 40대 기수론을 기치로 내걸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웅을 겨루다 근소한 차로 낙선한 뒤 박 전 대통령의 정적이 되어 생과 사를 넘나드는 힘든 삶을 영위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는 ‘내란음모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 20년형 등으로 감형되다 82년에 극적으로 석방된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야권후보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하는 바람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지만 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비아냥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그런 비아냥을 뒤로 하고 대통령 도전 4수 끝에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준비된 대통령’으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취임 이후 김 전 대통령은 IMF 구제금융 시대를 2001년 조기에 청산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이 시절 강력한 구조조정과 긴축정책 등으로 국부유출, 중산층 몰락이라는 적잖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햇볕정책’으로 점철되는 남북화해무드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통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고 동북아와 한반도의 냉전을 평화체제로 변화시킨 공로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그렇다고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선 영호남으로 대변되는 지역주의, 계파정치, 보스정치 등 전 근대적인 정치풍토 조성으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됐다는 평가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였던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위상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상대적으로 높다. 지난 2001년 아셈회의 당시 덴마크의 라스무센 총리가 각국 정상 중 유일하게 ‘excellent leadership’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일화가 이를 증명해준다.

이와 함께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는 언급 역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국제적 평가를 가늠할 수 있다고 본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통해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지만 민족화해에 대한 고인의 집념과 민주화에 대한 헌신, 인권에 대한 남다른 관심 등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도록 남은 사람들이 그 몫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삼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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