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미국 사람 믿지 말고, 소련 사람한테 속지마라. 일본 사람 일어난다. 조선 사람 조심하자”는 말을 필자는 소싯적에 들었다. 이 말은 아버지 이전 세대부터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인데, 근원을 찾아보니 1950년대 한국 정치 상황에서 나온 유행어라 한다. 그렇지만 ’조선 사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일본 사람 일어난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발발시켰던 1940년대에 시중에 나돌던 말이 아닌가 짐작된다.
 
타국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라는 이 말에서 공교롭게도 중국은 빠져있다. 우리나라가 옛적부터 중국을 대국으로 여기거나 또는 형제국으로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연으로 인해 언급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에 러시아(구 소련), 일본보다는 중국과 더 가까이 하려는 외교적 시도가 눈에 띈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 이명박정부 말기에 한일군사협정 체결 등 정보 교환 합의가 이루어지자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다.

그러던 중국이 박근혜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일본보다는 중국을 국제 파트너로 비중 높게 평가하고, 박 대통령이 일본에 앞서 중국과의 정상외교를 하게 되자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중국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박 대통령의 이번 방중을 크게 환영했음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박 대통령을 마중하러 공항에 영접 나온 중국 관리의 격에서부터 달랐다. 지금까지는 중국정부의 차관보급 인사가 국빈을 맞이했는데, 차관급 인사가 나오는 등 예우가 달랐다.

시진핑 중국 수석도 이번 한중 정상외교를 비중있게 인식하고, 박 대통령 일행을 크게 환대하였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잘 나타났다. 일정에도 없는 시진핑 주석의 오찬 방문 등은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일찍이 겪지 못한 특별 대우였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세계적 강대국이 된 중국이 현재 한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TV를 켜니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정상외교에서 양국 간 우호 증진과 경제 협력에 좋은 방향이 전개됐음은 매우 고무적이다. 박 대통령은 “중국이 한국 통일에 좋은 동반자가 돼 달라”는 뜻을 폈고, 시 주석도 “이번 대통령의 방문이 앞으로 두 나라 관계에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제하고 “양국 정부가 신정부가 출범한 이후 방중해 많은 성과를 낳았고 서로의 이해를 심화시킴으로써 좋은 시작이 되었다”고 화답했다.

3박 4일간 한중 정상회담에 관한 여러 보도를 접하면서, 특히 중국정부가 박 대통령의 방중기간 내내 보인 따뜻한 성의에서 우리의 국력 신장을 느낄 수 있었다. 지구상에 많은 나라가 존재하지만 일개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대접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국력이 강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직도 세계는 근세사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등 강대국에 의하여 국제 질서가 잡혀가는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동반 상승을 꾀하고, 한반도 안보를 지탱하는 받침대로서 역할이 컸다. 국력이 약하고, 국제사회에서 주변국으로 밀려날 때 큰 불행을 겪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제 치하 36년 동안 역사를 통해 이미 경험했다. 대한민국이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미국 등 연합국의 도움으로 광복된 지 이제 60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점령 하에 있다가 연합국 측에서 마련한 ‘카이로 선언’의 결과로 인해 주권을 되찾은 나라이니,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과 한국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은 나라이기도 하다.

약소국의 역사적 사실은 냉엄하다. 근대사를 보면 대한민국이 스스로 독립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강대국의 결정에 의한 피동적으로 주권이 회복된 불운한 역사를 갖고 있다. 1943년 11월 23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카이로에 모여 5일간 회담을 했다. 3국 대표들은 대일전에서 상호 협력과 일본의 영토 문제에 대한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고, 12월 1일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기본적인 사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탈취한 만주, 대만, 평후제도를 중국에 반환한다’는 내용이었고, 한국 조항은 추가로 특별히 들어간 것인데,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적절한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결국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라는 문구가 선언문에 포함됨으로써 한국은 독립국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했던 불행한 역사가 주는 교훈은 국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가 됐고, 이번 박 대통령의 한중 정상외교에서 중국이 보인 태도에서도 ‘국력이 우선’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됐다. 박 대통령이 중국 방문 기간 중 중용(中庸)에 나오는 ‘군자의 도는 멀리 가고자 하면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높이 오르고자 하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나라 일 또한 군자와 같으니, 안으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꾀하고, 바깥으로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낮은 곳, 가까이부터 시작하여 높이 오르고, 멀리 가는 그 지혜를 배우고 실천해야 할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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