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자유주의의 탄생은 그 기반부터 진보적이었다. 근대 시민혁명의 혁명적 에너지를 담아내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의 가치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부터 자유주의는 자유시장주의로 변형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본가들의 깃발이 되고 말았다.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와 결합한 셈이다. 이대로만 있었다면 자유주의는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괴물이 되어 그 진보적 에너지를 소진하고 말았을 것이다.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역동성과 사회성, 평등성을 회복코자 하는 시도가 이뤄졌다. 밀(J.S. Mill), 그린(T.H. Green) 등의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가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진보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ism)’라는 것도 바로 이 개념이다. 자본가(귀족)의 기득권과 각을 이룬다는 점에서 노동자 개인의 자유를, 그리고 시장중심주의와 각을 이룬다는 점에서 공동체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보수당-자유당 체제도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뉴 패러다임이 아니다

안철수 의원의 싱크탱크 <정책네트워크 내일> 창립기념 심포지엄에서 최장집 이사장은 안철수 신당의 이념적 자원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평등과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안 의원 측근인 송호창 의원은 ‘진보적’인 것의 기준을 중산층과 서민의 민생 문제를 중시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직 완결된 이념체계가 아니라 기본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이해하더라도 첫 인상치고는 내용이 빈곤하고 또 새롭지도 않다.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는 점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먼저 안철수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진영싸움’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심지어 진영싸움을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표현으로 비판하였다. 옳은 지적이다. 따라서 그의 ‘새로운 정치’는 진영싸움을 거부하고 적대적 공생관계의 프레임(틀)을 깨는 것이었다. 한국정치에서 진영싸움은 지역과 이념을 양대 줄기로 한다. 물론 이 둘은 뿌리를 대부분 공유한다. 그래서 한국 정당체제를 ‘기득권 체제’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깨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기존의 프레임을 거부하고 새로운 프레임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것이 ‘패러다임 전환’이다. 프레임의 수평이 아니라 상승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안철수 의원은 스스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제시함으로써 기존 프레임에 편입돼 버렸다. 안철수 신당의 차별성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열 번 양보해서 모든 정책에는 이념적 기초가 있기 마련이고, 무릇 정당은 이념적 지평 없이는 인재를 모으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진보적 자유주의’의 내용을 튼실하게 채웠어야 했다. 왜 자유주의적 지향성을 갖는지, 그리고 ‘진보적’이라고 할 때 무엇이 진보적이며 그 대립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래야 안철수 신당에서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새로운 정치’와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평등이나 시민사회, 중산층과 서민 등의 얘기를 한다면 지금의 민주당과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최장집 이사장은 ‘진보적’인 것의 개념을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시장의 과잉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들어보면 박근혜정부의 정책방향과 비슷하게 들린다. 또 어떻게 보면 민주당 정강정책과 딱 맞는다. 그렇다면 안철수 신당의 차별성 부각이 아니라 차별성 실패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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